남북한의 분단과 대립으로 인해 수십년 지속됐고, 북핵 문제 등으로 더욱 심각해진 남북 갈등보다 최근에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남남 갈등이 더 심각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집권 이후 여당 일각에서 나온 보수궤멸론, 20년 집권론 등이 민주적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어렵게 만들었고, 조국 사태와 추미애 사태로 확산된 진영 간 갈등은 ‘적과 동지’의 논리를 확산시키면서 남남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적과 동지’의 논리란 바이마르공화국 당시 독일의 정치학자이자 헌법학자였던 카를 슈미트가 그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던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그는 권력실증주의자라고 평가될 정도로 규범적 정당성을 도외시하면서 힘에 의한 권력투쟁의 논리를 주장했던 사람이고, 나치의 집권과 권력 행사를 정당화한 활동으로 인해 나치 패망 이후 전범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의 적과 동지의 논리가 전후 독일에서 날카롭게 비판받았던 것은 민주정치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견 적과 동지의 논리는 정치의 실체를 잘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 따를 경우 민주적 가치와 무관하게 권력투쟁의 승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며, 그 과정은 정치적 세력 간 적대적 대립·투쟁이라고 보게 된다. 즉, 적과 동지의 논리는 민주적 가치를 경시할 뿐만 아니라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 군주세력과 귀족세력, 시민세력이 대립하던 당시와는 달리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정당성의 뿌리가 국민이다. 국민이 주권자이며, 국민의 인권과 이를 위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가 최우선 가치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당과 야당 모두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공통분모에서 출발하는 것이 민주정치다. 그런데 적과 동지의 논리는 이러한 공통분모를 부인하고, 오로지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정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적과 동지의 논리는 권력투쟁의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한다. 대화와 타협의 상대방, 협치의 파트너로 보지 않고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은 전체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과거 나치의 경우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하나의 적대세력을 타깃으로 만들어 지지세력을 결집시켰고, 그 적대세력을 와해시킨 이후로 새로운 적대세력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웠던 것이다.
반면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은 주권자인 국민의 인권 보장을 위해 국가권력이 구성되고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투쟁을 위해 국민 사이에(때로는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갈등을 키우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분권과 협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적과 동지의 구분과 적대적 대립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전제로 다양한 입장이 합리적으로 조율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는 어떤 모습인가. 여당과 야당, 나아가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대립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편 가르기가 되고 있다. 적의 주장은 무조건 틀렸고, 동지의 주장은 무조건 편들어야 하는 적대적 대립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의 완전한 몰락을 추구하는 적대적 극한투쟁은 민주주의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인권의 올바른 보장과도 충돌한다. 그럼에도 보수를, 혹은 진보를 모두 쓸어버려야 제대로 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주의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민주주의를 벗어나 전체주의에 심각하게 경도돼 있는 것이다.
각 정당의 색깔이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도,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대립이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갈등과 대립이 극단화돼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대화와 타협의 민주정치 및 이를 통한 인권의 강화를 위한 도구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서로의 다름을 관용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그 당연한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