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싼 것보다 중요한 것

입력 2020-09-11 04:06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지/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신동엽 시인의 시 ‘좋은 언어’의 시구가 마음에 간절히 와닿는다. 나는 ‘좋은 언어’ 대신 ‘좋은 책’으로 바꿔서 읽는다. 우리들이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내면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날은 언제든 찾아온다고, 그래서 그때를 위해 좋은 책으로 세상은 채워져 있어야 한다고.

책은 읽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이고 공연장이고 미술관이며 극장이다. 읽을 의지만 있다면 책은 독자에게 시공간을 넘어 누적된 지식과 지혜를 가져다준다. 그것이 책의 가치이고 사회적 역할이다.

작가와 출판사, 책방들은 요즘 날마다 ‘도서정가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법에 의해 한시적으로 시행된 도서정가제가 올해 11월에 끝나기 때문이다. 이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근심과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도서정가제는 전국 어디서나 차별 없이 정가대로 책을 팔자는 제도다. 누구나 무한 할인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안다. 싸게 팔 수 있는 책이 우대받는 무한 가격 경쟁 시장, 부익부빈익빈, 도태되는 작은 서점과 출판사, 도태되는 취향, 도태되는 소신, 도태되는 독자. 할인이 가속화하면 정가를 부풀리고 할인 폭을 크게 하는,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전략이 생겨난다.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댓글이 있다. “책을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도서정가제 때문에 생겼다. 책값이 비싸서 못 읽는다. 왜 출판사와 서점을 위해서 독자가 희생되어야 하는가”라는 분노 섞인 말이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귓등으로 흘릴 말은 아니나 몹시 답답한 마음이다. 결국 돈, 돈 때문에 열렬한 독서가와 출판사가 반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책값이 비싸서 책을 못 읽는 안타까움도 마음 아프고, 책값이 싸야만 책을 읽어준다는 야속함도 마음 아프다.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사실상 정가는 의미가 없어진다. 출판사든 서점이든 돈의 권력 관계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1만원의 정가를 두 배로 올린 뒤 반값으로 팔면 싸다고 느낄 것인가. 아니, 그보다 값에 따라 취향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는가. 책이 단순한 기호품의 지위를 벗어날 순 없는가. 책의 가치에 관한 생각을 바꿀 순 없는가. 이런 생각들로 복잡한 지금 나는 책과 독서의 의의를 또다시 헤아려보지만, 아무리 헤아려도 할인 표시가 된 고만고만한 책들이 즐비한 모습보다는 다양하고 좋은 책들이 놓인 모습을 보고 싶다.

또 이런 댓글도 있다. “영어권 출판 시장에는 도서정가제가 없다. 출판사가 노력해서 소장용 하드커버와 일반 독서용 페이퍼백을 싸게 펴내니 얼마나 좋은가.” 이건 출판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어권의 크기와 사회 인프라 문제다. 영어권 출판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만들고 판다. 초판 발행 부수가 다르다. 또 영어권 사회는 개인이 직접 책을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도서관 인프라가 좋고 독서 클럽도 활성화돼 있다.

반면 우리나라 출판 시장은 앞의 두 가지 버전으로 책을 낼 수 없을 만큼 협소하다. 인구 탓이든 책에 대한 호오 탓이든 책을 읽어줄 사람이 부족하다. 도서관도 부족하고 이용객도 부족하다. 한국의 도서관 정책이 더욱 발달해 독서가 익숙해지기를, 다양한 출판사의 다양한 책이 도서관에 구비되기를 출판인도 바란다. 그래서 값보다 내용으로 먼저 독자를 만나고 싶다. 싼 것보다는 중요한 것이 우리 문화를 고양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조성된 책 문화가 돈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도서정가제는 꼭 필요하다. “무릇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파인 곳에 물 한 잔을 부으면 검불은 떠서 배가 되지만, 잔을 실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장자’의 ‘소요유’ 한 대목이다. 가벼운 검불만 떠다녀서야 문화 강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