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번아웃된 그녀… 겨울잠 속으로

입력 2020-09-10 20:38 수정 2021-11-04 16:55
‘내 휴식과 이완의 해’에 나오는 뉴요커 여성의 유일한 도피처는 숙면이다. 그녀는 막대한 유산과 아름다운 외모 등 완벽해 보이는 조건을 갖추고도 세상에 냉소하고, 일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급기야 직장을 그만두고 1년 동안 동면에 들어갈 계획에 착수한다. 잠에서 깬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질까? 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19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종식되는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지만, 이 전염병은 우리에게 이전의 삶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팬데믹의 창궐은 우연히 돌출된 사건이 아니고, 인류의 과대한 욕망이 부른 인과적 참사다. 이를 뒤로 무를 수는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뉴 노멀’이라고 말한다. 작금의 상황을 일상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불편을 불편이 아닌 삶의 자연스러운 영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명과 설명은 몇몇 이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당장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생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공연, 전시 등으로 자신의 결과물을 보여야 하는 문화예술인의 처지 또한 급하기는 마찬가지다. 친구들과 가을볕을 즐기기는커녕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 못한 채, 조그마한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 또한 무척 크다. 이렇듯 거의 모두에게 바이러스는 일상의 재난이 되고 있지만, 그중 비정규직 시간강사의 고통 또한 현실감이 있다. 지난주에 소개된 서수진 작가의 장편소설 ‘코리안 티처’의 어학당 강사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묘사된 갑-을-정-병 중, 병의 위치에서 겪어야 하는 부조리와 폭력은 그대로인 채로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의 부담까지 떠안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시간 강사들이 화상회의 프로그램이나 영상 녹화 등을 통한 새로운 수업 방식에 대해 늘어난 업무량과 학교와 학생의 비협조, 익숙지 않은 환경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확대된 고통만큼 처우가 개선되면 좋았겠으나 알다시피 요원한 일이다. 그나마 그들의 고용이 유지되고 있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강사를 비롯해 대면을 기본으로 하는 일자리 상당 부분이 사라지거나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니 우리 대부분에게는 팬데믹이고 기후위기고 뉴 노멀이고 자시고 바로 오늘내일이 문제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는 그런 우리에게 휴식을 강권하는 듯하다. 마냥 쉴 수 없는 우리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전염병의 고압적인 태도는 애석하지만, 인류에게 바이러스의 형태를 빌려 보내온 자연의 경고와 요구는 합당해 보인다. 덜 이동하라. 덜 섭취하라. 덜 소비하라. 일견 간단해 보이는 그것들을 실천하기가 고통스럽다. 우리는 움직이고, 먹고, 쓰는 걸 멈춰본 적이 없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이후는 더욱 그렇다. 멈추기는커녕 더 빠른 속도를 미덕으로 여긴다. 우리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여느 짐승들처럼 겨울잠이라도 잘 수 있다면 모를까.


오테사 모시페그 장편소설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겨울잠 자듯 잠에 빠져든 뉴요커 여성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1세계 백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빼어난 미모를 갖췄으며 고등 교육까지 마쳤다.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지만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안고 있는 그의 내면은 점점 바스러진다. 그는 약물에 기대어 단 하나뿐인 안식처로 도피한다. 그것은 숙면이다. 잠을 위해 그는 점점 더 강한 약물을 처방받고, 더 깊은 잠에 빠져들수록 잠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진다. 그렇게 그는 1년 동안의 동면을 결심하게 된다.

소설은 9·11 테러가 뉴욕을 덮치기 한 해 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그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달력의 가장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었고, 비디오테이프 대신 DVD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지구 전체를 삼키고 있었고, 곧이어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새로운 기준이 삶에 요구될 때 그는 잠을 잔다. 그의 긴 잠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술적 모티브, 친구와의 작별인사, 무책임하고 자유로운 도피, 내밀한 상처의 자가치유, 삶에 대한 아이러니한 동력… 그러나 읽는 내내 내게 다가온 감각은 나도 자고 싶다는 무기력이었다. 그때의 주인공이 풍족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상처로 인해 번아웃이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풍족한 물자와 고도의 기술에도 불구하고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시스템으로 인해 탈진되었다. 게다가 우리는 밤늦게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코리안 티처’의 인물들은 비대면 강의를 준비할 것이고, ‘내 휴식과 이완의 해’의 인물들은 뉴욕의 급격한 전염과 더불어 급격히 터져 나오는 미국의 모순에 복잡한 심사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잠들 수 없는 나날에, 남은 잠마저 쫓아버릴 질문이 머릿속을 괴롭힌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