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칸타타에 참석하지 못한 건 큰 실수였다. 아내가 화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시민운동에 관여하는 걸 못마땅해 했다. 목회만 해도 바쁜데 왜 지역 일에 관심을 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역교회 목사로서 지역사회 일에 관심을 두는 건 필요한 일이었다. 젊을 때 나의 꿈이 정치인 아니었던가. 담임목사를 하면서 정치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내가 가진 영향력을 선한 곳에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짐했다. “다시는 교회 밖 일로 교회를 돌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2002년 상반기에는 장년이 1400여명 출석했고 교회학교 학생도 600명을 넘어섰다. 지하에 있던 350석 본당은 너무 좁았다. 그사이 교회 주변에 교육관도 샀다. 주차장을 짓기 위해 1074㎡(325평) 넓이의 대지도 샀는데 이 땅도 좁았다. 지하 5층을 파도 80대밖에 주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어느 날 한 장로님이 찾아왔다. “목사님, 더이상 이 자리에선 어렵습니다. 교회 이전을 해야 합니다. 한군데 봐 둔 곳이 있습니다.”
교회 이전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망했던 교회에서 부흥을 경험해 더욱 애착이 컸다. 게다가 장로님이 봐뒀다는 땅이 너무 외진 곳이었다. 일산에서 금촌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일산과 파주의 경계였다. 심지어 비포장도로였다. 2000년대 초반에 비포장도로가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그곳에 지금의 교회를 지을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회 이전에 대해 장로님들도 하나둘 동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기도 후 장로님들과 함께 그 땅에 모였다. 장로님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다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니 장로님들도 크게 내색하지는 않으셨다. 답사한 뒤 당회를 열었다.
“아무래도 땅 보는 눈은 저보다 장로님들이 낫습니다. 장로님들께서 땅을 좋게 보시니 저도 좋습니다. 이전을 하도록 하시죠. 건축위원회를 조직합시다. 대신 저는 건축위원회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장로님들은 좋은 예배당 짓는 데 힘써 주세요. 저는 그동안 교인을 배가시키겠습니다.”
개척한 지 6년 만이던 2002년 8월 건축위원회가 조직됐다. 사실 이것만 해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교회 성장이 멈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 우리는 그토록 어렵던 때 가파른 성장을 경험했다.
건축은 일정대로 진행됐다. 장로님들은 본당을 4000석으로 짓자고 했지만, 나는 너무 넓다고 생각했다. 결국 본당은 2000석으로 정해졌다. 나는 넓은 예배당을 교인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열심히 성도들을 심방하고 훈련시켰다. 새 교인이 매주 교회를 찾았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