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 문제를 다룬 드라마들이 부쩍 늘었다. ‘달리는 조사관’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닥터탐정’ ‘청일전자 미쓰리’ 등. 오랫동안 노동 문제가 드라마에서 다루기 힘든 소재였음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변화에 물꼬를 틔운 드라마가 ‘직장의 신’(2013)과 ‘미생’(2014)이다. 외환위기 이전 노동자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나뉘었다면 외환위기 이후의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다. ‘직장의 신’(2013)과 ‘미생’(2014)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기계가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직장의 신’은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원작으로 한 코미디로,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 대한 풍자와 통찰을 담아낸다. 원작보다 코믹 설정이 강화되고 한국 상황에 맞는 각색이 재미를 높였다. 특히 김혜수의 파격적인 연기는 지금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미스 김’(김혜수)은 ‘슈퍼 계약직’ 파견 사원이다. 정규직 월급의 3배를 받으며,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회사에 대한 소속감이 전혀 없고, 회식에 참석할 땐 시간 외 수당을 받는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 회사에 연락처도 남기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직장인이 있을 수 있냐고? 이는 미스 김의 무한대에 가까운 업무 능력 덕분이다. 차 대접이나 사무기기 수리 같은 온갖 잡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어 회화, 꽃게 손질, 홈쇼핑 모델, 탬버린 반주 등 모든 방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가 슈퍼 울트라 능력으로 회사를 위기 상황에서 구하는 경험을 한 경영진들은 미스 김에게 계약연장이나 정규직 전환을 제안하지만 미스 김은 3개월의 계약 기간이 끝나면 회사와 연을 끊고 외국으로 휴가를 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환상의 존재다.
하지만 드라마가 현실을 몰라서 이런 환상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장규직(오지호)과 정주리(정유미)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실상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3개월 계약직 정주리는 성과를 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사소한 실수도 해고의 빌미가 된다. 그렇다면 정규직 직장인은 행복한가. 장규직은 위계적인 조직 문화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모든 영혼을 갈아 넣어 회사에 충성을 다한다. 다른 사원 앞에서 회사의 은혜를 찬양하고 어디서든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다. 드라마는 비정규직 노동 환경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규직의 전인격적 착취를 조롱한다. 즉 정규직이 되는 것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스 김은 신자유주의 노동 시장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이다. 드라마는 첫 시퀀스를 통해 미스 김의 전사를 보여준다. 노동쟁의 현장이 폭발하고 미스 김이 화상을 입는 장면은 그가 부당 해고와 노동쟁의를 겪으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음을 암시한다. 미스 김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서 가장 기계적이지만 가장 자아를 잘 보존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서 흔히 사람은 ‘인적 자원’이라 불린다. 사람의 학력이나 경력을 가리킬 때 쓰는 ‘스펙’이란 단어도 본래 기계의 성능이나 사양을 뜻하는 단어였다. 또한 회사는 더 이상 직원을 뽑지 않고 필요할 때만 파견 회사를 통해 3개월씩 쓰고 갈아 치운다. 즉 사람이 기계나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의 집단적인 조직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족’이니 ‘동료애’니 허위의식을 주입하며 노동자들의 열정을 착취하기 일쑤다.
이런 모순적인 노동시장에서 미스 김은 스스로 이름을 지우고 익명의 존재가 돼 고용계약서가 아닌 ‘사용설명서’를 내민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이 그토록 원하는 ‘고성능 기계 되기’를 자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스 김은 기계가 됨으로써 비로소 자본주의의 전인격적 착취에서 벗어난다. 그는 미스 김이 아닌 시간에 김점순이라는 개인으로 자신만의 호젓함을 누린다. 이런 그의 모습은 오직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삼는 노동자에게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준다. 정규직이 되고 직급이 높아지는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 시간을 줄이고, 소비와 소유에 대한 물욕을 줄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경력과 자아를 계발해 ‘프로페셔널’이자 ‘전인’이 되는 ‘프리랜서’의 삶을 일종의 모델로서 제시한다. 어쩌면 이것이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에서 자아를 잠식당하지 않고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대안적 탈출구인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를 넘어서는 윤리
‘미생’은 윤태호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극사실적인 직장 드라마다. 드라마는 프로 바둑기사로 키워졌으나 실패하고 고졸 검정고시 학력으로 대기업 인턴이 된 장그래(임시완)를 중심으로 직장인들의 악전고투를 담는다. 드라마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회사원들의 일상이 피 튀기는 전투의 연속임을 보여준다. 인턴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신입사원이 되고, 계약직과 정규직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드라마는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사회생활의 난맥상을 보여준다. 회사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업무상의 갈등이나 성차별, 내부고발의 문제 등을 깊숙이 짚으며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둑에 빗대어 풀어낸다. 드라마는 협력 업체와의 상생이나 성 접대에 반대하는 신념 등 구체적인 직장 윤리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대목은 사회 초년생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고 성장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그래와 동기들은 천적 같은 상사들을 만나 고전한다. 짠 내 나는 사례들은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전달한다. 요컨대 ‘자신이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고, 일단 굽히고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착실히 기본기를 쌓은 뒤 필요할 때 능력을 보여주라’는 교훈을 추출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흔한 자기계발서의 가르침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미생’에는 자기계발서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문제의식이 담겨있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윤리에 국한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경쟁과 착취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밀하게 그리며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가치를 유지한 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을 담는다. 가령 죽을 둥 살 둥 노력하는 장그래가 원하는 것은 부귀영화나 출세가 아니다. 그저 공동체의 일원이 돼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길 원할 뿐이다. 그가 하는 일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 봤자 일일 뿐’ 임을 알지만, 그래도 ‘내 일’이라는 작은 성취감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장그래를 비롯한 평범한 직장인들이 노동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소속감과 성취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사회는 ‘월급과 승진밖에 모르는 일벌레’로 살아가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소속도 쓸모도 없는 ‘잉여’의 삶을 살아가라며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장그래의 이름 ‘그래’(YES)는 ‘긍정의 정신’을 뜻한다. 그 자체는 생의 윤리일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품은 ‘긍정의 정신’을 빨아먹고 버리는 경쟁과 착취 시스템에 의해 긍정의 정신은 결국 자본을 살찌우는 자기계발서의 이념으로 전락한다. 여기서 개인이 품은 긍정의 정신을 자본에 순응하는 노예의 정신이요, 자기계발서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보다는 개인들이 자신의 긍정 에너지를 발휘하면서 소속감과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드라마는 마지막 회에 장그래와 오상식과 김대리가 퇴사하여 작은 회사를 꾸리는 것을 보여주며, 새로운 공동체와 시스템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직장의 신’과 ‘미생’은 신자유주의의 모순 속에서 가장 구체적인 삶의 화두인 노동을 드라마의 세계로 불러들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두 작품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지만, 같은 문제의식에 도달한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떻게 개인의 존엄을 유지하며 자본과 관계 맺고 살 것인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쓰레기 같은 삶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 모순은 더욱 깊어지고 있지만 돌파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