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비유에서 비난받아 마땅해 보이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이 두 사람은 제사와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들이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사와 율법으로는 죽어있는 우리를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종교심을 갖고 있어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결코 그것으로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종교 생활을 하고(제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의를 동원하면(율법)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런 삶의 방식이 마땅히 구원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다.
반면 사마리아인을 보라. 그는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구원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며 경멸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자를 구원한다.
어디서 구원하는가. 유대 땅이다. 유대 땅은 사마리아 사람들로서는 원수의 땅이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는 땅이다. 그 땅으로 손수 걸어 들어간다.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는가. 죽어가는 자가 구원해 달라고 말할 힘도 없이 쓰러져 있는데, 먼저 불쌍히 여기고 다가간다. 그리고는 아픈 부위를 만지고 피 같은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치유한다.
이후 그를 주막에 데리고 가,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모든 비용을 대신 전부 지불한다. 그리고는 주막 주인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자신을 대신해 이 사람을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사마리아인은 누구의 모습과 같은가. 그렇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 똑같다. 그는 안전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위험한 땅, 고통의 땅에 스스로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죄에 빠져서 완전히 죽어 있는 우리를 찾아와 마음과 육신의 깊은 상처를 십자가의 피로 어루만지시고 구원하셨다.
그리고는 십자가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즉, ‘다 지불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이 땅을 떠나시며 성령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다.
그렇다. 이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인. 지금 예수님은 그들을 치료하고, 아픈 상처를 싸매려 함에도 오히려 모욕하고 비웃고 있는 그들을, 이 사마리아인이 당한 일에 빗대어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만약 이 비유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나를 찾아오시고 내 마음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이 비유는 그냥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른 종교 가르침과 전혀 차이가 없는 내용으로 끝나게 된다.
요즘 많은 사람이 교회에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목회자의 타락, 맘몬주의, 헌신자의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실 이것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강단에서 ‘복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단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선포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주를 이룬다. 이 세상을 사는 기술과 방법만 난무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제에 너무 열을 올려서 ‘복음’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없는 메시지가 만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착한 일을 해서 모범이 되는 것,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의 결과일 뿐이다. 복음은 죽어가는 나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구원했고, 그 과정에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수용 목사(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