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6월 30일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마주 앉았다. 기록자 한 명만 대동한 단독회담에서 카터가 말한다. “나는 귀하가 실행하는 긴급조치 9호의 폐지와 가능한 한 많은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합니다.” 회담 후 카터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통해 석방을 원하는 정치범 명단을 한국에 전달한다. 주한미군 철군 정책으로 압박받던 박정희는 7월 5일 주한 미대사를 통해 180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알렸고, 카터는 7월 20일 철군 정책 보류를 발표한다. 이 모든 과정은 비밀에 부쳤고, 30년이 지난 후 비밀 해제된 문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인권을 위한 ‘조용한 외교’의 전형이다.
2014년 2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최종보고서가 공개된다. 1년여 동안 4차례 공청회를 거쳐 80명 이상 피해자와 전문가를 대상으로 북한 인권 유린 상황을 확인해 400쪽 분량의 보고서에 담았다. 북한 당국이 체제 유지와 지도층 보호 등을 위해 조직적으로 모든 종류의 인권을 짓밟는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강력 반발하면서 2015년 1월 ‘반공화국 인권모략책동에 대한 조사통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유엔이 제기하는 인권 문제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왜곡·날조라고 주장한다. 유엔의 조사 보고서 발간은 대표적인 ‘이름 불러 창피 주기’식 인권 압박이다.
첫 사례는 분명한 인권 개선 결과를 도출했으나 두 번째 사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이 장문의 보고서를 낸 것 자체가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 제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증거로 심각한 인권 유린 행동에 제약이 될 수 있다. 조용한 외교와 창피 주기, 둘 다 인권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지난 4일은 북한 인권법 시행 4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12월 본란에 ‘채점 불가능한 국정과제 92번’이라는 제목으로 문재인정부가 북한 인권법을 사문화한다는 칼럼을 쓴 지도 1년이 돼간다. 여전히 북한인권재단은 출범 못 했고, 북한인권기록센터는 홈페이지도 없이 아무런 결과물도 제시 안 하고,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는 임명하지 않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정부 차원의 북한 인권 관련 행보는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서 매년 발표하는 ‘북한인권백서’가 전부이다. 지난 7월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6명을 아느냐는 야당 의원 질의에 “모른다”고 대답할 때 다시 한번 현 정부의 북한 인권에 대한 태도가 확인됐다. 북한 인권에 대해 일말의 관심이 있다면 2013년, 2014년에 걸쳐 북한이 불법 억류한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선교사를 모를 수 없다.
북한 인권법에 명시된 통일부 장관의 권한은 막강하다. 북한인권재단에 야당 몫의 추천인이 포함되더라도 북한인권법 11조에 ‘통일부 장관이 재단을 지도·감독’하고, 10조에 ‘통일부 장관이 지정하는 사업’을 수행하게 돼 있어 장관이 얼마든지 재단의 역할·사업·범위를 통제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않는다. 북한인권기록센터는 출범 초 약속한 인권침해 용의자 몽타주까지 내지는 않더라도 최소 수준의 분석·조사 보고서는 공개할 수 있다. 그러나 센터 자료실에는 자체 보고서 하나 없이 유엔, NGO, 연구기관, 미국·영국 등 타국 자료만 듬성듬성 있다.
기대를 접는다. 조용한 외교든, 망신 주기든 문재인정부는 북한 인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칼럼을 또 쓰는 것은 역사의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이다. 문재인정부와는 달리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은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과 납북된 한국인을 안타까워하고 북한 당국의 조치를 요구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문재인정부의 행태는 역사가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