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호남·마지막 기회… 여당 반발 알고도 공공의대 추진 이유

입력 2020-09-04 00:11
보건의료노조 조합원들이 3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의사들의 집단 휴진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공공의료 확대를 위한 사회적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며 보건복지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대표 면담도 요청했다. 윤성호 기자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확대 등을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의료계와 정부여당이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원점에서 재검토도 할 수 있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았지만, 의료공공성 강화라는 문재인정부의 정책 방향에 큰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공공의대 설립 등은 의료계에서 원천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이 상황에서 이를 정부·여당이 추진할 경우 거센 반발에 부닥칠 것이라는 점은 여당도 이미 파악했던 사안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부·여당은 왜 하필 지금 의료계를 대상으로 강공 드라이브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우선 여권에서는 집권 4년차를 맞은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자 국정과제인 공공의료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면서 확산된 공공의료 강화 여론, 지난 4월 총선에서의 기록적인 압승에 따른 자신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정부 내에 이를 완성하려면 임기 말인 내년은 어렵다. 따라서 시기는 올해가 적기인 셈이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선거운동에 나섰을 때부터 ‘병원비 걱정 없는 든든한 나라’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비급여의 급여화를 통한 의료비 부담 줄이기, 서울과 지역의 의료 양극화 해소 등 의료공공성을 강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특히 이번 당정 협의 핵심 내용인 지역의사 선발전형과 의무복무를 통한 공공의료인력 확보는 의료 양극화 해소를 위한 핵심과제다.


정부·여당은 서울 강남을 비롯한 부유층 자제들이 전국 의대 진학을 독점하는 구조, 의사협회의 ‘밥그릇 지키기’ 때문에 의사들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현실이 지역의료체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원인이라고 본다. 이런 구조 때문에 지방의대를 졸업해도 지방 병원에 근무할 사람이 없다는 게 여권의 시각이다.

공공의대 설립에 관여했던 민주당 관계자는 3일 의료계 반발에 대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결국 의사단체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불과하다”며 “의사 정원을 늘리면 정부와 논의를 안 하겠다는 게 의사단체들의 기본 입장”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동안 의사단체들이 논의를 외면해오다가 이제 와서 논의를 하지 않았다고 반발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반면 의료계는 정부·여당의 발표 시기가 부적절했다고 주장한다. 고려대 의대 최재욱 교수는 “지금 보건의료정책의 핵심은 절체절명의 코로나19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인데 정부·여당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여당 지도부의 ‘원점 재검토’ 입장에 대해서도 “이미 방향은 정해졌으니 보완책을 논의하자는 것”이라며 “의료인들 역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에서 정부·여당 스스로 공조를 깨뜨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당의 이 같은 속도전은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 민심 지키기와도 무관치 않다. 의대 설립은 지자체마다 눈독을 들이는 사업이다. 특히 2018년 2월 전북 남원의 서남대 폐교 이후 의대 정원 49명을 활용한 공공의대를 둘러싸고 치열한 유치전이 벌어졌다. 남원과 전남 목포, 순천 등 호남 지역에서는 의대 유치가 오래된 지역 숙원사업이다.

현재 여권에서 공공의대 설립 관련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호남과 인연이 깊다. 고향이 전남 순천인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2018년 11월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난 6월 관련 법안을 발의한 김성주 민주당 의원 역시 지역구가 전북 전주다.

민주당은 20대 국회에서 공공의대 설립을 비롯해 많은 입법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한의사협회와 보수야당의 반대 속에 소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19로 조성된 유리한 여론, 176석이라는 막강한 거대 여당의 힘을 바탕으로 입법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총선 공약을 만들 때부터 21대 정기국회에서는 통과해야 되니까 당정 협의는 7월에 하고 정기국회 때 법안 내서 통과시키자는 스케줄이 있었다”며 “지금 시점에서 여당이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판단하에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법안 추진에 속도조절에 들어간 양상이다. 한정애 신임 정책위의장은 최근 “당의 이름을 걸고 강행처리를 위해 진도를 나가진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지난 1일엔 최대집 의협 회장과 만나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정책을 완전하게 제로 상태에서 논의할 수 있다”며 극적 타협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여권 내부적인 기류는 여전히 강경하다. 특히 당 지도부 내에선 “이번에 물러서면 절대 개혁을 하지 못한다”는 공감대도 퍼져 있다고 한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의사들이 정부 약속을 믿지 못하고 파업한다고 한다면 이는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 사태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결국 의협과 전공의들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 국회가 원점에서 논의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법안 심사 과정에 참여해 국민들 앞에서 토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당 일각에서는 의료계가 이 정도로 세게 나올지는 몰랐다는 반응도 나온다.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어느 정도 의협의 반발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대로 추진 가능하다고 봤는데 반발이 생각보다 세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지금 당장 추진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철회할 상황은 아니다. 가는 방향은 맞는다”고 했다.




백상진 김판 이현우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