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교회 부목사를 지냈어도 담임목사가 되면 시행착오를 겪는다. 목회 성공 여부는 변수 대응력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나도 고군분투했다. 1998년이었다. 서울 온누리교회가 새 교인이 등록하면 9주 동안 교육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과정을 이수한 교인에게 교인 번호를 발급했다. 이 시스템이 좋아 보였다.
온누리교회 교인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로 했는데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9주 동안이나 교육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너무 많은 교인이 한꺼번에 등록한 게 이유였다. 교육 대상자가 예상외로 많아지다 보니 장기간 교육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래도 교인 교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나섰다. 옥한흠 목사님이 쓴 제자훈련 교재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열심히 강의했고 교인들도 잘 따라와 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스로 강의 평가를 해보니 내가 너무 중심에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정성진 제자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나만의 교회, 나만의 신자를 만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시 온누리교회에 있던 반태효 목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반 목사가 ‘두란노 1대 1 제자 양육 프로그램’이라는 새 교육과정을 소개했다.
교재를 보니 마음에 들었다. 온누리교회가 통 큰 후원도 해줬다. 훈련받은 교인들을 일산까지 보내 제자 양육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우리교회에 적용해 큰 성공을 거뒀다. 프로그램이 교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알파 코스도 운영했다. 강의는 아내가 맡았다. 알파 코스를 통해 6000여명의 교인이 교육을 받았다.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한 선교단체의 교재를 편집해 ‘생활신앙’이라는 자체 교재도 제작했다. 삶이 예배로 바뀌는 교인을 양육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이 공부반도 아내가 이끌었다.
이처럼 개척 초기부터 평신도 교육에 힘쓴 이유가 있다. 당시 교계에선 목사들이 평신도를 너무 무지한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자성이 있었다. 그게 못마땅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만인 제사장이라는 개념을 만천하에 소개했다면 실천해야 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평신도는 목사의 설교만 듣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래서는 건강한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이 아이디어를 준 곳이 있다. 바로 군대였다. 여러모로 군대는 나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군에서 엿본 평생훈련 시스템을 교회에 적용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