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저녁 약속이 없어진 대신 밤에 산책을 자주 하고 있다. 거리와 속도를 기록할 수 있는 앱을 열어보니 8월에는 비가 많이 왔음에도 한 시간 정도씩 열여섯 번을 걸었다. 운동이라기보다 집에 있기 답답해서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터벅터벅 걷는 일도 여러 달을 반복하다 보니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됐다.
달리거나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치면서 자극을 받은 걸까. 운동과는 거리가 먼 내가 어느 날, 이왕 걷는 거 제대로 걸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바로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어깨를 펴면 등과 허리가 세워지고, 배를 당기는 느낌으로 힘을 주면 엉덩이까지 긴장이 된다. 몸을 곧게 편 다음에는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는다는 생각으로 한 걸음씩 신중하게 내디뎌 본다. 그렇게 걸을 때면 안 쓰던 근육이 느껴지고, 걷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내가 걷고 있다’는 감각은 꽤 근사하다.
걷다보니 호흡이 필요해서, 코로 숨 쉬는 연습도 하게 됐다. 만성적인 비염 때문에 습관적으로 입으로 숨을 쉬는 처지라서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내뱉는 일은 무척 진지하게 행해진다. 양쪽 콧구멍 사이의 벽이 휘고 부어서 몇 년 전에 수술까지 받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었다. 소원 빌 기회가 생기면 “코로 숨 쉬게 해주세요”라고 애원했던 비염환자에게 ‘코로 숨을 쉰다’는 감각은 감동이다.
이렇게 6㎞ 정도 걸으면 걷기든 숨 쉬기든 이제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것 같아 무척 고무된다. 밤의 산책은 기다리는 일과가 됐다.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는 ‘머리 감는 법’도 새롭게 시도해보고 있다. 미용 전문가인 유튜버가 하라는 대로 머리를 충분히 적시고, 샴푸는 소량만 사용해 손바닥에서 먼저 거품을 낸 후, 두피 속부터 꼼꼼하게 문지른다. 최근에 머리카락이 부쩍 많이 빠지는 것 같아서 걱정했던 마음은 그렇게 진정이 된다.
사실 마흔이 넘으면서 감지되는 신체의 변화들에 당황하는 중이었다. 가까이 있는 글자가 잘 읽히지 않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고, 얼굴의 주름이 짙어진 것을 확인할 때면 마음이 위축됐다. 얼마간은 부정하며 버티다가 결국 굴복하는 심정으로 안경을 맞추고, 염색이나 천연 샴푸를 검색해 보고, 기능성 화장품을 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로 40대를 맞는 마음이 가벼워질 리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산책 속에서 이루어진 경험은 일상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됐다. 걷기나 숨 쉬기, 머리 감기 같은 당연하고 작은 일이라도 정성을 들여서 다시 배워보는 경험, 개선의 여지를 찾아 나아가는 경험은 다른 일들에서도 가능할 터였다.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아직 인생의 절반 정도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무려 40년 가까이 계속될 인생의 후반전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더 밀도 높게, 제대로 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긍정할 수 있게 됐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거나 시작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40대 이후에 성공적으로 창업을 하거나 전성기를 보낸 사례도 무수히 많지만, 꼭 그렇게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 그동안 미뤄뒀던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해 면허증을 따고, 용기를 내서 춤을 추고, 외국어를 배우고, 운동을 시작해도 좋겠다. 아무것도 선뜻 시작하기 어렵다면, 일단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해보길 권한다.
어린이날, 성년의 날, 노인의 날은 있는데 왜 중년의 날은 없을까. 무사히 40대에 이르렀고, 또 그만큼을 살아가야 한다면 이쯤에서 축하와 축복의 세례를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원래’라는 함정에, ‘나이’라는 숫자에, ‘과거’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시도할 수 있다. ‘이제서야’가 아니라 ‘이제부터’ 나는 처음으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인생의 후반전이 펼쳐졌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