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성진 (12) 개척 직후 터진 외환위기에도 꾸준히 교인 늘어

입력 2020-09-04 00:04
정성진 목사와 송점옥 사모(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1998년 거룩한빛광성교회 옛 성전 본당에서 두 손을 들고 찬양하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 도농에 인조견사를 뽑던 원진레이온 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 용지에 8000세대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사업계획이 발표됐다. 단지 안에 종교부지도 나왔다. 현장에 가보니 공장은 철거된 뒤였다. 아파트 건축 공사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많은 세대가 들어오는 만큼 목회지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나려면 3년 이상 남아있다는 게 단점이었다.

‘공사장 한복판에서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경기도 고양에 문 닫은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교회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 목회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다만 고양 일산 신도시에는 이미 28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1993년부터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 대형교회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도시의 장점은 이미 사라졌다. 목회의 레드오션이었던 셈이었다. 도농보다 나을 게 없었는데도 왠지 마음이 끌렸다. 아내와 기도를 한 뒤 일산에서 개척하기로 했다. 96년 12월 초, 김창인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일산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 지체할 것 없다. 지금 가자.”

김 목사님이 직접 계약하는 자리에 간 경우가 없었다. 김 목사님은 그날 직접 일산의 부동산까지 오셔서 직접 계약을 하셨다. 97년 1월 ‘거룩한빛광성교회’는 이렇게 출발했다.

광성교회가 큰 재정을 지원해 줬지만, 빚이 7억원이나 됐다. 나는 김 목사님께 배운 대로 목회했다. 하루하루 희망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주변에 교회가 많았지만 새 교인도 꾸준히 등록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해 11월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온 나라가 뒤집혔다. 은행 이자율이 24%까지 치솟았다. 순리대로 하면 나는 그때 망했어야 했다.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모두가 절벽에 몰렸던 때였다. 의지할 건 주님뿐이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면서 목회에 힘썼다.


감사하게도 교인이 늘었다. 98년 1월 출석 교인이 400명을 넘어섰다. 교회학교 학생도 200명을 웃돌았다. 새신자가 한 주도 끊이지 않고 등록했다. 심지어 추석이나 설 명절 중에도 교회를 찾아오는 새신자가 있었다. 개척교회 목사 입장에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은행 이자를 한 번도 연체하지 않았다. 이자율도 9%까지 떨어졌다. 교회를 개척하면 여러 차례 고비가 찾아온다. 개척 직후 외환위기의 높은 파고가 덮쳤지만 이겨냈다. 남들보다 늦게 개척했는데도 교인이 늘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