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고위 간부들에게 국정운영 권한을 일부 이양하는 이른바 ‘위임 통치’가 본격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아닌 사람의 동정이 실리는 일이 극히 드문 노동신문 1면에 고위 간부들의 소식이 연달아 실리는 등 전례 없는 파격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짊어진 통치 부담의 무게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북한이 변했다
최근 노동신문은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과 김덕훈 내각 총리, 리병철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제8호 태풍 ‘바비’로 피해를 입은 황해남도를 방문한 사실을 1면 머리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으며 국내 북한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모든 주민이 볼 수 있는 노동신문의 1면은 주로 북한 최고지도자 동정이나 국정운영 구상을 전하는 용도로 활용돼왔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가 아닌 이들이 신문의 ‘얼굴’을 연달아 장식한 셈인데, 김 위원장의 허락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4일 “과거에는 국가수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정도가 노동신문 1면에 실릴 수 있었다”며 “상당히 이례적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다는 조짐은 대북전단 살포 문제로 남북 관계가 급격히 얼어붙은 지난 6월에도 포착됐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자신의 대남사업 총괄 권한이 오빠 김 위원장과 노동당,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직접 밝히면서 대남정책에서 상당한 재량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깨알 리더십에 무슨 일이?
김 위원장의 리더십은 2011년 말 집권 이후부터 줄곧 ‘만기친람’형으로 불렸다. 실무적인 부분까지 워낙 꼼꼼하게 지시를 내리고 챙기는 데 따른 평가다. 공사현장을 방문해 책임자를 싹 바꿀 것을 지시하거나 방치된 자재들을 가리키며 “한심하다”고 나무라는 식이다. 2012년 5월 평양의 놀이공원인 만경대유희장을 방문했을 때는 허리를 숙여 잡초를 하나하나 뽑는 모습이 포착되며 화제가 됐다.
김 위원장은 9년간 대소사를 일일이 챙기며 쌓인 이른바 ‘통치 스트레스’에 지쳐 제한적으로 국가운영 권한을 일부 이양키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김 위원장이 통치 스트레스를 줄일 목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책임 회피 차원’ ‘자신감의 발로’ 등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보고했다.
김 위원장의 체형 변화만 봐도 그가 굉장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폭음·폭연·폭식으로 스트레스를 달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문가들은 그의 체중이 매년 늘어 현재 130㎏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여사가 문재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에게 “항상 담배를 끊기를 바란다고 부탁하고 있지만, (김 위원장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권력 아닌 권한만 분산
김 위원장은 고위 간부들에게 전결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통치 체계를 조정해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권력이 아닌 권한 일부만 고위 간부들에게 넘겨준 뒤 자신은 최종적으로 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최종 결정권을 가진 것은 결국 김 위원장이다”고 평가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도 “김 위원장이 권력은 본인이 쥔 채 제한된 수준의 권한을 부여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남·대미정책 전반은 김 제1부부장, 경제 분야는 박 부위원장과 김 내각 총리, 군사 분야는 최부일 노동당 군정지도부장, 전략무기 개발 분야는 리 부위원장에게 맡기지만 최종 결정은 자신이 내린다는 얘기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라는 김 제1부부장의 지시로, 벼랑 끝으로 치닫던 남북 관계에 급제동을 건 것도 결국 김 위원장이었다.
다만 그동안 철저히 성과주의 원칙에 입각해 인사를 단행해온 만큼 결과가 부실하다고 판단할 경우 가차 없이 부여한 권한을 뺏을 것으로 전망된다. 혈육인 김 제1부부장조차 지난해 ‘하노이 노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경질되는 수모를 겪었었다. 지난 1년간 노동당 정치국 위원 및 국무위원회 위원의 80%가 교체됐는데, 성과주의 인사 원칙을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됐다. 조 위원은 “권한이 확대돼 좋을 것 같지만, 권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고위 간부들로서는 이전보다 훨씬 큰 부담을 갖고 업무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치 스트레스는 여전
하지만 통치 체계 조정에도 김 위원장의 스트레스는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권한을 분산했다고 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판단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김 위원장이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유일 영도 체제에서 실패에 대한 최종 책임은 김 위원장의 몫”이라며 “통치 체계 조정으로 인한 스트레스 경감 효과는 사실상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역대 최고 수준의 대북 제재가 여전히 북한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가운데 올 들어 코로나19 사태에 홍수 피해까지 겹치면서 김 위원장의 고심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 산하 피치솔루션스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북한 경제가 올해 6% 역성장할 것으로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9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8차 당 대회를 내년 1월에 개최하겠다고 선언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2016년 7차 당 대회에서 내세웠던 경제정책 전반이 실패했음을 깨끗이 인정하고 새로운 국가발전 계획을 제시하겠다는 계산이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