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공공 서비스 확대가 시도될 때마다 불거지는 갈등은 숙명인 것 같다. 국공립 유치원을 확대한다고 하면 사립 유치원이 반발한다. 공공주택을 짓겠다고 하면 주변에 사는 지역주민들이 들고일어난다. 지금은 공공의료 강화 목적으로 의사 수를 늘리는 시도에 의사들이 집단으로 반발하고 있다.
물론 위의 사례들은 각각 성격이 다르고 관련된 집단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강조하고 싶은 건 그동안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복지·의료 서비스가 매우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선 압축적인 근현대화 탓에 일단 민간 자원에 의존해 여러 사회 서비스가 시작됐다. 학교, 병원, 복지시설 모두 개인이 지은 게 국가가 지은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 중심 체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공에 어울리는 성격의 일이 개인에게 맡겨지면서 사욕이 일으킨 부작용이었다. 뒤늦게 정부가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수십 년에 걸쳐 자리 잡은 민간 체계를 흔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공공 서비스는 민간이 제공하는 것보다 형편없을 것이라는 통념도 극복하기 힘들다.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려면 민간의 이해관계자들과 전쟁 수준의 싸움을 해야 하고 수요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서비스의 질도 높여야 한다.
그럼에도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더 확대돼야 한다. 민간과 시장에 모든 걸 맡겼을 때 발생하는 부조리를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다만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는 방법은 좀 더 공격적이고 치밀할 필요가 있다. 수요자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민간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것과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공공 서비스 확대에 의미가 생긴다.
최근 국민일보 이슈&탐사2팀은 공공임대주택에 관한 보도를 했다. 공공임대주택도 비슷한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와 다른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폭넓게 공급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중산층도 살 수 있는 질 좋은 평생 주택을 공급하겠다”며 뚜렷한 방향을 제시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소외계층에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일이다. 부동산 정책 전문가들에게 두 가지 과제에 관한 대책을 물었더니 ‘적극적인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질 좋은 서비스와 본연의 서비스를 다 하려면 돈을 많이 써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간이라는 상대는 교육·복지·의료 어느 분야든 반세기 이상의 공력을 가진 존재다. 공공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압도적인 재정 투입이 아니면 그에 맞서기 힘들다.
이런 시각에서 정부의 공공의료 강화 정책를 보면 최우선 과제는 적극적인 재정 투입이 아닐까 싶다. 수십 년간 민간에 의존한 탓에 공공의료 체계는 너무 취약하다. 공공병원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공공의료를 신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프라 구축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정부는 많은 돈을 쓸 마음이 없어 보인다. 2018년 ‘공공보건의료 발전 종합 대책’에는 기존 의료기관의 책임성 강화와 공공 보건의료 인력 양성, 거버넌스 구축 등만 언급될 뿐 재정 투입 내용은 찾기 힘들다.
최근 공공의료 강화 정책에 대한 의료계의 반발은 정부가 정책의 방점을 잘못 찍어서일 수 있다. 지역 곳곳에 공공의료 인프라를 구축하는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발표를 먼저 하고 의대 정원 확대와 지역의사제 도입을 제안했다면 의료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만성 적자라는 지방 공공병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부터 하겠다고 했다면 정책의 진정성을 좀 더 인정받지 않았을까.
권기석 이슈&탐사2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