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우 칼럼] 바보 감사원장 최재형의 운명

입력 2020-09-02 04:01

“더는 친여 감사위원 안 돼” 일방적 청와대 요구에 반기
대통령 인사권 견제 목적의 제청권이 형해화된 것에 대해 최 원장이 문제 제기
질 게 뻔한 싸움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국민에겐 법과 원칙 고수하는 바보 공직자가 필요

조용한 성품의 판사 출신 최재형 감사원장이 감사위원 인선을 놓고 이렇게 청와대와 각을 세우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감사원 직원들은 최 원장이 자신의 신조와 다른 현실에 초기에는 앙앙불락할지 모르지만 결국 ‘원만히’ 임기를 마치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거의 모든 전임 원장들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불만에 찼지만, 현실을 깨닫고 묵묵히 그 길을 갔다. 최 원장을 감사원장으로 지명한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도 확신했을 것이다. 곧고 원칙에 충실한 분이라는 평판은 안다. 하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하는 판사 출신 정도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여권의 확신이 과장은 아닌 것이 현실적으로 감사원은 대통령 직속 행정기관이며, 사무총장을 비롯한 5급 이상 모든 감사원 공무원의 임면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다. 또 감사원장이 아무리 날고 뛰어도 친여 성향 감사위원으로 포위하면 그만이다. 감사원 최고위 협의체인 감사위원회의 의사 결정에서 감사원장은 7인의 감사위원 중 1표일 뿐이다. 감사원 설치 근거가 헌법에 있고, 감사원법에서 ‘대통령에 속하지만, 독립적 지위를 갖는다’고 규정한 것은 맞는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독립적 지위’가 아니라 ‘대통령에 속한다’는 문구가 훨씬 힘이 세다는 것을 입증한 것 아닌가.

여권의 실책은 최 원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최 원장을 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최 원장에 대해 단순히 원칙론자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양심과 원칙에 대한 신념이 매우 굳음은 물론이다. 최 원장의 차별성은 이러한 신념을 실천한다는 점이다. 두 딸을 낳은 뒤 2000년, 2006년 두 아들을 입양해 키웠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동료를 2년간 업어서 출퇴근시켰다. 보통 사람들은 흉내도 못 낼 일들이다. 그 원천에는 기독교 신앙의 힘이 있다는 게 주변의 분석이다. 양심과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닥치는 고난을 신앙을 성숙시키는 연단(鍊鍛)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헌법 이론에 만만찮은 내공을 갖춘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최 원장은 1995년 3월부터 2년간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근무했다. 청와대는 지난 4월부터 공석이 된 감사위원에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을 제청해 달라고 두 차례 요구했지만, 최 원장은 이를 거부했다. 김 전 차관은 검찰 출신으로 조국·추미애 등 현 정부 법무부 장관을 지지한 친여 인사다. 여권은 이를 정치적 목적이 있는 항명이자,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감사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최 원장의 고민이 이해된다. 공석인 한 자리와 최 원장을 뺀 5명의 감사위원 전원이 현 정부에서 임명됐다. 이미 친정부 쪽으로 지형이 기운 상황에서 또 한 명의 친여 인사를 받아들여서는 감사원 업무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은 허구일 뿐이라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이번 갈등에서 또 주목해야 할 점은 감사위원 임명제청권에 대한 최 원장의 문제 제기다. 헌법 98조는 ‘감사위원은 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에 선행해야 함을 명백히 했다. 감사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국무위원과 행정 각부의 장을 임명할 때 제청권을 행사하게 돼 있는 국무총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의 임명제청권은 형해화된 정도가 아니라 사문화에 가깝다. 대통령이 임명 대상자를 미리 선정한 후 통보하는 식이어서 사후 동의나 양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임명제청권이 대통령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행사돼야 한다고 최 원장이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는 국회에서 “사전에 제청권자와 임명권자가 충분히 협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견제와 균형과는 거리가 멀어 제왕적 대통령 소리를 듣던 한국 대통령이다. 4월 총선 압승으로 입법부를 여당이 장악했고 검찰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견제기능도 무력화됐다. 무섭게 폭주하는 대통령 권력에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고위 공직자가 최 원장이다. 최 원장은 중앙 부처 한 고위 관료의 말대로 “현실도 모르고 대통령과 싸움에 나선 바보이자 고집불통”일지 도 모른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욱 나라와 국민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법과 원칙이 무너지는데도 침묵하거나 잇속에만 눈이 어두워 조변석개하는 공직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최 원장 같은 바보가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야 희망이 있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