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한 느낌과 불안한 마음은 일상이 되었다.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을까 싶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매일 매시의 일이 되었다. 감염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병 자체보단 병을 막기 위한 집행 당국의 온갖 규제와 지침 앞에서 뒤숭숭해지고 불안해진다. 쏟아지는 규제와 지침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주체적 삶을 가꿔가기보다는 집행 당국이 시키는 대로 방향감각도 없이 따라가는 나 자신이 왜소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에게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 같은 불안심리라 하겠다.
이런 심리가 퍼지면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적 활기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정부 권력에 마냥 이끌리는 대중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적극적 시민으로 전제된다. 각자 시민으로서 주체성, 적극성을 발휘할 때 체제는 개방성, 참여성, 다양성, 대표성, 평등성 등 민주주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 시민적 활기야말로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핵심 요인인 것이다. 과도한 집행 권력의 간섭은 시민을 피동적, 소극적 존재로 전락시켜 주체적 시민성을 억누르고 시민적 생기를 죽일 수 있다.
집행 권력은 이미 과하게 부풀어 있었다. 국회가 여야의 교착으로 입법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해 공백이 생긴 틈에 행정부가 행정입법 권한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또한 지구화로 국제무대에서의 조정 필요성이 커지고, 정보화로 정책 전문성이 중요해지고, 시대의 급변성과 돌발성이 국정의 신속함과 종합적 판단을 요청하면서 행정부는 업무, 영향력, 위상에서 비대해져 있었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가세한 것이다. 이 돌발변수에 대처하는 일은 주로 행정부에 속한다. 추가경정예산 등 입법부가 할 일도 행정부가 선제 행동을 취하고 주도권을 행사한다. 감염병 공포는 행정부의 특징인 효율성, 신속성, 통일성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입법부의 특징인 다양성, 신중성, 참여성, 토의성은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게 한다. 국민은 이제 모든 사안에서 행정부부터 쳐다보게 되었다. 코로나19가 행정부 비대화를 점화시킨 것은 아니나 기름을 부었다고 볼 수 있다. 집행 권력이 이렇게 커질 때 시민은 작아지고 시민적 활기는 식는다.
더 심각한 문제로 코로나19에 직결되지 않은 영역에서도 집행 권력이 비상상황을 이용해 큰 제약 없이 정책을 쏟아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다. 근래 정부는 보건, 의료는 물론 복지, 교육, 부동산, 조세 영역에서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심지어 수도 이전 등 중대한 사안에서도 일방적 모습을 보인다.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한번 커진 집행 권력은 쉽게 원위치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시민적 생기의 위축이 단기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면 민주주의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진다.
이 경고등은 다방면의 반성을 촉구한다. 우선 행정부의 냉철한 자제가 요구된다. 집행권의 확대가 단기로는 편리하겠으나 장기로는 모두에게 재앙이 된다.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표방체제에서는 집행권의 폭증이 민주주의 가치에 반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정책 논란에 대한 책임 문제로 이어지기 쉽다. 하는 일이 많으면 결국 부메랑을 맞는다는 점은 근래의 정치사가 보여준다. 그러므로 행정부는 집행권을 행사할 때 정말 불가피한 것인지, 적정 범위인지 엄격한 잣대를 대야 하고 비판에 겸허해야 한다.
국회도 여야를 막론해 행정부의 비대화를 막고 시민적 활기를 찾는 데 동참해야 한다. 지난한 세월을 거쳐 국회와 행정부가 힘의 균형을 이뤄왔는데 공든 탑을 무너뜨릴 셈인가. 여러 측면의 노력이 가능하다. 한 예로 올해 2월 국회법 개정을 통해 국회의 행정입법 통제 권한이 보완되었지만 충분하지 않다.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통제가 보다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핵심적으로 언론·시민단체·학계가 각성해야 한다. 집행 권력이 과도해질 경우 시장만 위축되는 것이 아니고 시민사회도 생동감을 잃는다. 비대해진 행정 당국과 결탁해 눈앞의 작은 이득을 취하거나 심지어 그쪽으로 편입되기를 바라지 말고, 무한증식의 본능을 가진 집행 권력이 선을 지키도록 엄혹한 견제를 할 필요가 있다. 시민성을 키우고 시민적 활기를 되살리는 일이 시민사회 파수꾼의 본분 아니겠는가.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