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 옆 다트게임, 학습실 옆 다락방… 공간이 곧 교재

입력 2020-08-28 04:05
충남 천안 신당고 연극동아리 학생들이 지난 20일 프로젝트학습실에서 지도교사와 대본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다락방처럼 꾸민 공간으로 분산돼 연습하다가 필요하면 다 함께 모여 대사를 맞추길 반복하며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교생들이 학생 휴식 공간에 매점을 설치하는 안건을 두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3학년들은 얼마 못 쓰지만 후배들이라도 매점을 즐겼으면 좋겠어. 뭐 하나 사 먹으려면 교문 밖으로 가야 했잖아.”(3학년 A학생) “찬성, 다들 좋아할 거예요.”(2학년 B학생) “좋긴 한데 누가 관리하지. 여긴 우리 공간인데 선생님들 도움을 받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2학년 C학생) “쓰레기도 많이 나올 거 같고, 매점이 생기면 누군가 희생해야겠군.”(3학년 D학생) “애들이 좋지 않은 내기를 하거나 셔틀(심부름)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고….”(2학년 E학생)

지난해 봄 충남 천안 신당고교에서 학생회 임원들과 건축과 동아리 학생들이 벌인 토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한창 먹을 나이여서 매점 선호도가 높았다고 한다. 여의치 않자 자판기로 논의가 이어졌고 관리 측면을 고려해 음수대 설치로 의견이 모였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이현정 교사는 “매점이 본질은 아니다. 작은 공간 하나 결정할 때도 학생들이 공간을 분석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며 “매점 설치 아이디어를 처음 낸 학생도 납득하는 걸 보고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학교 도서관에 마련된 독서 공간(위)과 휴식시설에 마련된 다트 게임 시설의 모습. 이들 공간은 학생이 주도해 만들고 관리하는 ‘공간혁신’의 결과물이다.

쓸모없던 공간에 들어선 ‘감성공간’

지난 20일 찾은 이 학교는 정부의 미래학교상(像)인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의 한 축을 구성하는 ‘공간혁신’을 미리 실현해본 곳이다. 공간혁신은 단순 학교시설 개선 사업이 아니다. 학교 공간을 직접 사용하는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 공간을 설계하면 교사와 건축 전문가들이 협력해 실현해준다는 개념이다. 설계부터 사용, 유지관리까지 전 단계에서 학생의 성장을 이끌게 된다는 면에서 단순 사용자 중심 설계와도 지향점이 다르다.

이 학교는 지난해 3월 별관(C동) 3층 전체에서 공간혁신 실험을 시작했다. C동 3층은 수업이 이뤄지는 본관 건물과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당초 컴퓨터실, 여교사 휴게실, 회의실, 영어교실 등이 있었지만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학생과 교사들은 전체 학교 공간을 분석한 뒤 C동 3층이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결론 내렸다.

지난해 11월 완성된 공간을 학생들은 ‘감성공간’이라 불렀다. 본관에서 구름다리를 통과해 왼쪽으로 돌면 학생만의 공간이 펼쳐진다. 북카페처럼 꾸며놓은 ‘홈베이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노출형 천장에 에폭시 소재로 바닥을 깔고 그 안을 다양한 색상의 소파와 책들로 채웠다. 그 옆에는 다트 게임과 에어 하키 게임장을 꾸몄다. 수업을 기다리거나(요즘 고교생은 선택형 수업을 듣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있을 수 있다) 휴식 시간에 활용하도록 했다.

“공간 유연해지면 수업도 유연해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프로젝트학습실과 동아리실이 마련돼 있다. 프로젝트학습실은 카페 테이블로 채워진 널찍한 수업 공간과 움푹 들어간 다락방 같은 공간이 세 개 있다. 방에는 빈백(신축성 좋고 푹신한 소재의 의자로 앉는 형태에 따라 모양이 자유자재로 변한다)들로 채워져 있어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모둠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지난 20일에는 연극동아리가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극동아리를 지도하는 강석주 교사와 10여명의 학생이 10월로 예정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전역 가는 길’이란 30분짜리 창작극으로 학생들이 방학에 농촌 체험 활동을 가는 길에 음주운전으로 아이들이 목숨을 잃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주전역은 음주운전에서 따왔다고 한다.

교사와 아이들은 대본 연습을 하며 수업공간과 다락방에 수시로 모였다 흩어졌다. 전체가 모여야 할 때는 수업공간으로, 나뉘어서 연습할 때는 빈백에 앉아 대본 읽기에 몰두했다. 이곳 역시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담긴 공간이다. 강 교사는 “딱딱한 교실에 있으면 아무래도 생각이 경직된다. 아이들은 이런 공간에서 더 많이 생각하고 더 활발히 의견을 내놓는다”며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공부하고 놀이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하나가 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 공간혁신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현정 교사는 “공간이 유연해지면 수업도 유연해진다. 교사는 세미나실이나 동아리실에서 조별 활동하고 프로젝트학습실에서 발표수업을 해볼까. 어떤 단원에서 이런 수업이 적합할까. 수업 설계는 또 어떻게 할까 같은 고민을 끊임없이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학생은 폐쇄형, 교사는 강의형

학생들은 오붓한 폐쇄형 공간을, 교사들은 탁 트인 강의형 공간을 선호했다고 한다. 폐쇄된 공간의 안전 문제나 일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이 학교 도서관 역시 학생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 삼삼오오 모여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가 마련돼 있다. 책과 책장에 가려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도록 돼 있다. 일부 교사는 CCTV나 거울을 설치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공간혁신의 취지가 안전 및 생활지도 영역과 부딪히자 학생들이 해법을 가져왔다.

학생회는 공간 사용 매뉴얼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선생님들에게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동영상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동영상은 학생들이 만든 공간에서 잘못된 행동이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상황이 나오고 다른 학생 셋이 튀어나와 “안돼요”라면서 팔을 교차해 X표시를 하는 유쾌한 내용이다. 걱정하던 교사들도 동영상을 보고 일단 학생들을 믿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다만 지난해 2학기 끝날 무렵 공간이 완성됐고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제대로 공간이 활용되지 못해 누가 옳았는지 결과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이 과정 자체가 학생들의 변화를 이끈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3학년 이용훈군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는데 용기를 내야 한 걸음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주변 사람과 소통하는 과정도 뿌듯했고 협동하면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경험도 좋았다”고 말했다.

천안=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포스트 코로나 넘어 미래학교로]
▶①-1
▶①-2
▶②-1
▶③-1
▶③-2
▶④-1
▶④-2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