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성진 (8) 학교 부당한 조치에 투쟁… 대치하다 무기정학

입력 2020-08-31 00:07
정성진 목사(가운데)가 1989년 프랑스에서 신학대학원 동기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학우회장이던 정 목사는 신학대학원 남성중창단 유럽순회공연에 동행했다.

1985년 말, 나는 금왕교회 사역을 마무리했다. 아내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게 이유였다. 주중에는 출근하고 주말에는 먼 곳까지 와 사역을 돕던 아내는 늘 피곤해 했다. 결국, 간염에 걸렸다. 제대로 쉬질 못하니 잘 낫지도 않았다. 그러다 유산까지 하게 됐다. 더이상 이렇게 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교인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야 했다. 입학시험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질 않았다. 1986년 첫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때 이미 나는 31살이었다. 남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조급해졌다. 막 공부에 속도가 붙던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86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내 신앙의 모판이셨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한 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있다.


절치부심 끝에 이듬해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합격했다. 신대원 생활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시대가 그만큼 혼란스러웠다. 87년 4월로 기억한다. 2학년 선배들이 캠퍼스에 정권을 겨냥한 플래카드를 걸었단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한때 민주투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나 아니던가. 학교의 조치가 부당하다고 봤다. 당시 나는 99명의 학생에게 자퇴서를 받아 학교에 제출하고 투쟁하기 시작했다. 플래카드에서 시작된 학내 분규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종합관에 멀쩡한 창문이 없을 정도였다. 징계자가 줄을 이었다. 학생들은 방어벽을 치고 학교와 대치를 이어갔다. 나도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88년, 징계 중 신학대학원 학우회장에 당선됐다. 학생들의 마음을 보듬어야 할 위치가 됐다. 학교 관계자들과 8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농성을 풀기로 합의했다. 학교는 모든 징계자를 구제했다. 그리고 화해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당시 학장과 이사장이 노태우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해 설교와 축도를 했다. 이게 또 논란이 됐다. 신군부 세력을 축복했다며 학생들이 들끓었다. 공방 끝에 결국 학장과 이사장 모두 사임하며 일단락됐다.

비슷한 시기, 학우회가 대학의 재정 장부를 입수해 분석했고 비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재단 사무국장이 비리의 핵심이었다. 학우회 임원들이 주축이 돼 체포조를 조직해 재단 사무국장이던 A장로가 시무하는 서울의 B교회로 달려갔다.

“장로님, 교회에 있는 걸 알고 왔습니다. 어서 나오세요. 아니면 저희가 교회로 들어가겠습니다.”

비리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였다. 그날 A장로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사회가 해당 직원을 징계하도록 압박했다. 결국, A장로도 짐을 쌌다. 원우회가 거둔 성과였다. 몇몇 교수님은 격려도 해 주셨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92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였다. 안수식이 열린 교회가 재정 비리를 일으켰던 그 장로가 시무하던 B교회였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