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여호수아 14장 11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생명의 본성은 적극적이다’라는 주제를 묵상해 보자.
소극적이다, 혹은 적극적이다라고 말하는 건 보통 성격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성격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생명과도 연결된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적극적이다.
갓 태어난 돼지를 보자. 어미 젖을 빨겠다고 기를 쓰고 기어 다닌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다. 살기 위한 노력이다.
누가 나를 공격하면 방어 태세를 취하는 건 본능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적극성의 예다.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의 소극성을 성격의 범주로 이해하지 않고 병으로 규정했다. 이런 예를 들었다.
“눈이 내리는 어느 밤, 한 사람이 따뜻한 집에 있는데 전화가 온다. 수화기를 통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가고 있습니다. 빨리 피하세요.’”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는 따뜻한 집에서 추운 거리로 나가길 거부했다. 목숨이 달려 있는데도 말이다. 프롬은 이런 소극성을 정신적인 병리 현상, 다시 말해 자신을 파괴하는 독으로 규정했다.
아담을 생각해 보자.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거닐었다. 하나님과 대화했고 교제했다. 동물들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이처럼 적극적이었다. 아담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죄를 지은 아담은 소극적으로 변했다.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리고 말았다.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묻는 하나님에게 “하와가 줘서 먹었다”고 핑계까지 댔다. 적극적인 인간의 원형이 깨진 뒤 소극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브라함은 새로운 땅, 미지의 땅을 향해 길을 나섰다. 전 생애를 과감하게 던졌다.
여호수아나 갈렙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하나만 붙잡고 긴 세월을 살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했다. 가나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모두 두려워할 때도 가장 앞에 섰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스라엘의 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적극성 때문이었다. 유다는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요셉을 만나러 갈 때도 선두에 섰고, 아버지를 설득할 때도 그랬다. 유다의 정신을 이어받은 유다 지파는 모든 전쟁에서 선봉에 섰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적극적인 성품을 동반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다. 생명을 주신 것은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 생명 안에 있던 무한한 잠재력과 창의적인 능력이 열린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건 돈이 아니다. 내가 처한 상황도 아니다. 적극적인 태도가 인생문을 활짝 여는 열쇠다. 우리 인생은 현실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다. 돈에 의해서도 아니다. 내가 가진 태도가 인생을 조종하는 것이다.
현실은 우리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기 위해 무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험한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험한 인생의 바닷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돛을 달고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힘, 그 힘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다.
소극적인 마음을 버려야 한다. 오늘 하루도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