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에 얽힌 욕망의 이중성, 해학과 풍자로 그렸어요”

입력 2020-08-27 04:03
28일 네이버TV를 통해 국립오페라단 창작 신작 ‘빨간 바지’를 선보이는 나실인 작곡가(오른쪽)와 윤미현 극작가. 국내 창작 오페라계의 젊은 콤비로 주목받는 이들은 이번 작품에서 1970~80년대 강남 부동산 투기 광풍을 해학과 풍자로 그려낸다. 권현구 기자

2020년 대한민국을 달군 키워드 ‘부동산’. 좁은 한국 땅에 발 디딘 모든 이들의 욕망이 얽히고설킨 부동산 문제를 파고드는 오페라가 관객을 만난다. 오페라계 젊은 콤비 작곡가 나실인과 극작가 윤미현이 창작한 국립오페라단 신작 ‘빨간 바지’다. 1970~80년대 강남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한 복부인(빨간 바지)과 여러 인물 군상을 통해 시대의 부조리한 자화상을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본래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최근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 격상으로 무관중 공연으로 전환, 28일 오후 7시30분 네이버TV로 생중계된다. 방역 강화 직후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나 작곡가와 윤 작가는 “현장 공연을 올리지 못해 눈물 날만큼 아쉽다”면서도 “부동산은 모두를 아우르는 보편적 소재다. 온라인으로라도 꼭 필요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복부인은 권력자 남편 등을 통해 부동산 관련 고급 정보를 알게 됐던 여성들이 시초예요. 하지만 더 아늑하고, 따뜻한 곳에 살고픈 욕망은 모두가 같죠. 욕망에 투영된 인간의 이중성을 그리고 싶었어요.”(윤미현)

서울대 음대 작곡과 및 독일 뒤셀도르프 국립음대에서 수학한 나 작곡가는 서울시향 등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에 그치지 않고 음악극·연극·발레 등 장르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오페라 데뷔작 ‘나비의 꿈’을 선보이며 오페라 작곡가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유의 리얼리즘으로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등 굵직한 상을 여럿 거머쥔 윤 작가와 함께 지난해 ‘검은 리코더’에 이어 올해 ‘빨간 바지’를 선보인다.

‘빨간 바지’는 복부인 진화숙과 가난한 여인 목수정 등 등장인물 6명의 애면글면한 모습이 가슴을 뻐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음악만큼은 블랙코미디답게 경쾌하다. 3중창 ‘빨간 바지로 농사를 짓는’ 등 감동적인 아리아들도 포진해 있다.

“3년 전 작품을 제안받았을 당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복부인 이야기에 꽂혔어요. 그런데 복부인 소재의 과거 한국 영화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거나 누아르처럼 폭력적이더라고요. 작가님께 아이디어를 드렸더니 시대를 꿰뚫는 이야기로 새로 그려주셨죠.”(나실인)

일찍이 도시 재개발 소재의 극을 수차례 선보였던 윤 작가는 복부인 이야기에 제격이다. 2012년 극작가로 데뷔한 후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텍사스 고모’ 등 묵직한 작품들로 호평받은 윤 작가는 2015년 서울시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워크숍 ‘세종카메라타’ 멤버로 참여하면서 오페라로도 스펙트럼을 넓혔는데, 지난해 선보인 ‘텃밭킬러’(작곡 안효영) 역시 도시 외곽의 가난한 구둣방 가족 이야기를 다뤘다. 중학교 시절 ‘복부인이 되고 싶어라’라는 시도 썼었다는 그는 당시 뉴스를 연일 장식했던 빨간 바지 이야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책과 신문기사를 엄청나게 뒤졌어요. 1970년대 새마을운동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그 시절의 라디오 가격과 투피스의 모양까지 연구했죠.”(윤미현)

작품을 위촉받은 나 작곡가가 바로 윤 작가를 떠올린 이유는 이미 작품을 함께 하며 쌓은 신뢰가 두터워서다. 나 작곡가는 2016년 하반기 세종카메라타에 합류하면서 윤 작가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서로의 작품에 매료돼 지난해 라벨라오페라단의 ‘검은 리코더’로 처음 호흡을 맞춘 이들은 ‘빨간 바지’에 이어 29일에는 오페라 ‘춘향 2020’을, 내년 상반기에는 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를 선보인다. 이들은 “이제 척하면 척하고 아는 사이가 됐다”며 웃었다.

“윤 작가님의 작품은 늘 평범한 서민이 주인공이에요.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는 게 우리 예술의 역할이라고 느꼈어요. 작가님의 가사는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아리아에 잘 맞아요.”(나실인)

다만 실내 모임을 50인 이하로 규정한 정부 지침에 따라 기존 ‘빨간 바지’ 악보와 무대 구성 등을 급하게 재조정해야 했다. 배우 6명, 합창단 12명에 40명이 오를 예정이던 코리아쿱오케스트라 연주자를 16명으로 줄였다. 대신 14대의 현악기에 전자 악기 엘렉톤을 추가했다.

두 예술가의 강점 중 하나는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감각’이다. 가령 ‘춘향 2020’은 국내 최초로 시도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오페라다. 원전을 춘향 중심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몽룡이 과거급제에 실패하는 등 취업난을 포함한 요즘 시대상이 두루 녹아있다. 나 작곡가는 “1분마다 코믹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팬시한 오페라”라며 자신했다.

나 작곡가와 윤 작가의 행보는 국내 창작 오페라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지금, 이곳’ 대한민국의 얘기를 담은 창작 오페라들이 많아질 때 오페라와 관객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게 두 사람의 믿음이기도 하다.

“2020년을 ‘한국 창작 오페라의 태동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창작 오페라의 토양이 바뀌었어요. 오는 9월 국립오페라단 ‘레드슈즈’도 예정돼 있지만 근래 눈에 띄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거든요. 저희는 예술성도 놓치지 않으면서 주말 드라마처럼 재밌는 창작 오페라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검은 리코더’에 이어 ‘빨간 바지’가 그런 작품이에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