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성진 (6) 민중 신학 심취 목사보다 민주투사 되고 싶어

입력 2020-08-27 00:06
한 탄광 갱도에서 광부들이 간식을 먹는 모습. 국민일보DB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목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생기지 않았다. 신학교는 좌절과 고통을 부여잡고 도착한 도피성 같은 공간이었다. 1981년 10월 3일까지는 그랬다. 그날 아침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성진아. 10월 3일에 면목순복음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린다. 꼭 참석했으면 좋겠다.”

부흥강사는 현기봉 목사였다. 훗날 신비주의를 조장한다며 논란에 휩싸인 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교만한 신학생이었다. “부흥사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헌금이나 많이 내라고 하겠지.”

뭐라도 트집을 잡겠다며 작정하고 자리를 잡았다. 차가웠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데 2시간쯤 걸렸다. 부흥회 중 나는 쓰러지기까지 했다. 뜨거운 것이 몸으로 훅 들어오는 느낌도 받았다.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교만한 마음부터 내려놓게 해 달라고 구하고 또 구했다. “주님을 만나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머리로만 알던 예수님이 온몸과 마음, 영혼 깊숙한 곳까지 찾아와 나를 만져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목사보다 민주 투사가 되고 싶었다. 민중신학에 심취해 있던 운동권 학생일 뿐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다. 민중과 함께 평생 살고 싶어서였다. 일부러 가난한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곳이 충북 음성의 금왕교회였다.


서울장신대 졸업을 두 달 앞둔 1983년 10월, 이 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교회는 금왕광산 옆에 있었다. 폐광된 지 13년이 지난 광산이었다. 광산에 기대 살던 주민은 폐광과 동시에 가난의 나락으로 빠져 버렸다.

교인은 6명뿐이었다. 이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가난해도 순박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상을 꿈꿨다. 현실은 달랐다. 오랜 가난이 순박했던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수시로 범죄가 발생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몸이 아팠다. 무엇보다 나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항상 날 겨냥했다.

광부였던 남자 중 상당수는 진폐증 환자였다. 갱도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다. 홀로 된 여자들은 그리움에 시달리다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할 일이라곤 때때로 심방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역했던 2년 동안 140명을 전도했다. 민중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신학 수업을 마쳐야 했다. 동기들보다 나이도 많아 신학대학원 진학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사이 나는 주민의 일원이 됐다. 교인들로부터 과분한 사랑도 받았다. 이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금왕교회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인 83년 12월에는 결혼도 했다. 든든한 목회 동반자인 송점옥 사모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변화시킨 또 다른 변곡점이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