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나는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

입력 2020-08-26 04:01

요즈음 스스로 자주 묻는다. 내게 편한 언어가 사회적 약자들 마음에 상처 되지 않는지 염려한다. 그러나 잘 말하기는 참 어렵다. 내 말은 이미 내 삶에 오염돼 있다. ‘차별과 배제의 태도’가 듬뿍 배어 있다. 내게 익숙한 언어가 저절로 약자들을 공격한다.

책상 앞에 앉아 내 말의 자리를 적어 본 적이 있다. 내 언어는 남성 가부장의 말이고, 비장애인의 말이고, 이성애자의 말이다. ‘라떼는 말이야’로 첫머리를 떼기 십상인 아저씨의 말이고, 서울 변두리에 대출 낀 아파트 한 채를 가진 1주택자의 말이고, 소득 전체가 투명한 유리 지갑의 말이다. 읽기를 평생 업으로 삼은 ‘읽기 중독자’의 말이기도 하다. 목록은 끝없다. 누구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가면(persona)을 바꾸어 쓰면서 말한다.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그 가면의 의식과 가치를 반영한다.

아내한테 때때로 밖에서 쓰는 글과 집에서 하는 말이 다르다고 혼난다. 시치미 뚝 떼지만 소용없다. 사실이니까. 살아온 습관을 바꾸는 건 참 어렵다. 말이 못 따르고 몸은 더 안 된다. 아내의 분을 더 돋우지 않도록 빨리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나중에 서재에 들어앉으면 미안함에 마음이 괴롭다. 그러나 깨진 바가지가 밖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나의 언어는 아마 누군가한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고 때때로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인권운동에 관심을 품고 활동해 온 학자조차 자신도 모르게 ‘선량한 차별주의자’였음을 성찰하는 책을 내지 않았던가.

언어는 중립이 아니다. 강자의 편견을 반영한다. 일상은 모두의 일상이 아니다. 특정 계층의 삶이 늘 과잉 대표된다. 민주주의는 일터 앞에서만 멈추는 게 아니다. 집 앞에서도 멈추고, 학교 앞에서도 멈춘다. 또 무엇보다 입술 앞에서 멈춘다. 우리의 언어는 아직 충분히 민주화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없이 자주 말한다. 문제는 언어가 인간을 바꾼다는 것이다. 편견 깃든 표현을 자꾸 사용하면 머릿속도 편견에 익숙해진다. 신지영 고려대 교수가 “주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첫 번째 출발이 언어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국회에서 ‘절름발이’란 말이 문제됐다. 청년들은 이 말이 차별 언어임을 잘 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학교에선 이미 차별 표현에 대한 교육을 실시 중이다. ‘절름발이’ ‘벙어리’ 같은 단어는 장애인 비하 표현으로 소통 윤리를 위반한 대표 사례로 제시돼 있다. 아이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대안 표현을 고민해 쓰는 것이 마땅하다. ‘마음대로 말도 못하느냐’ ‘언어의 맥락이 중요하다’ 등으로 적반하장인 것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악의적 차별주의자’로 만드는 언행일 뿐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이 마음껏 말하는 자를 ‘갑’이라고 한다. ‘을’들은 항상 말하기 전에 먼저 맥락을 생각하고 표현을 애써 고른다. 일단 말한 후에 맥락을 봐 달라는 자 역시 갑에 속한다. ‘당신은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 당사자가 사과한 것은 민주주의자로서 성숙한 행동이었다.

얼마 전 경기도 화성시장이 집 아홉 채를 보유한 사실이 알려졌다. 경실련에 따르면 집들은 대부분 재개발 또는 재건축 가능 지역에 있었다. 시장은 싼 임대료로 서민 주거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고 변명했다. 시장의 화성시는 혹시 지구가 아니라 화성에 따로 있을까. 이 언어에선 왜 ‘부동산 투기’와 ‘서민 주거 안정’이 같은 뜻이 되는가. 예전에 시장이 “가족이 있는데 국가가 왜 장애인을 돌보느냐”는 참혹한 말을 한 사건이 떠올랐다. 시장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자기 말에 주의하면서 표현을 섬세히 골라 쓰는 것을 ‘언어 감수성’이라고 한다. 언어 감수성은 민주주의 시민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언어 민주화가 일상 민주화의 출발이다. 말하기 전에 누구나 자신한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의 언어로 말하는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