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퇴계를 존경한 대장장이

입력 2020-08-26 04:03

배순(裵純·1535~1613)은 경북 영주의 대장장이다. 한때 안동에 살면서 퇴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존경심을 품었다.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미천한 대장장이 신분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는 일상에서 퇴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을 택했다.

배순은 매일 새벽 일어나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집안에 앉아 자식들에게 절을 받은 뒤 일하러 나갔다. 당시 대장장이들은 만든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진흙이나 밀랍을 발라 적당히 눈속임해서 팔아넘겼다. 하지만 배순은 정직했다. 하자가 있으면 솔직히 말하고 값을 깎아주었다. 부업으로 양봉을 했는데 꿀을 채취할 때면 벌이 죽을까봐 숟가락으로 조금만 떠냈다. 하찮은 미물도 해치지 않으려 했다. 평생 욕설을 입에 담지 않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 배순은 애통한 심정으로 대장장이 솜씨를 발휘해 퇴계의 동상을 만들었다. 그 동상에 제사를 지내며 부모 상을 당한 것처럼 삼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흰옷을 입었다. 상을 마치던 날에는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동해 빠짐없이 참석했다. 선조 임금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의 나이 74세였다. 스승과 임금을 위해 젊은 사람도 하기 어려운 삼년상을 두 번이나 치른 것이다. 배순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그가 살던 마을을 배점(裵店)이라 불렀다.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다. 이곳에는 400년 전 배순의 존재를 알리는 비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스승이나 임금이 죽었다고 삼년상을 치를 필요는 없다. 본디 삼년상은 부모를 위한 것이며, 스승과 임금을 위한 상제는 따로 있다. 퇴계의 동상을 만들어 제사지낸 것도 썩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다.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행위는 퇴계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퇴계가 알았다면 황당했을 것이다. 상을 마치자마자 잔치를 벌인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배순이 복잡한 예법을 몰랐던 탓이다. 그저 죽은 사람에게 최고의 애도를 표하는 방법이 삼년상이라 믿었고, 퇴계에 대한 존경을 담아 재주를 다해 정성껏 동상을 만들었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전부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소박하고 진실했으므로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는 배순이 퇴계에게 수업을 받고 제자가 됐다고 하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배순은 한 번도 퇴계를 만나지 못했다. 당연히 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 퇴계의 학문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당시 백성이 대개 그렇듯 배순 역시 문맹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퇴계는 스승이 아니라 종교에 가까웠다.

종교는 신앙과 의례로 구성된다. 신앙과 의례는 조화를 이뤄야 한다. 다만 본질은 신앙이며 의례는 어디까지나 형식이다. 배순은 의례에 어두웠지만 신앙만은 독실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는 퇴계의 어떤 제자보다 퇴계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퇴계를 만난 적이 없다는 점도, 일자무식이었다는 점도 흠이 아니다. 퇴계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 사이에서 대장장이 배순의 존재가 유난히 빛나는 것은 그 소박하고 진실한 신앙 때문이다.

정부의 집합제한 명령에도 대면 예배를 강행한 교회가 1000곳이 넘었다고 한다. 전체 교회에 비하면 미미한 비율이지만, 워낙 교회가 많으니 무시할 수준도 아니다. 반드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례에 집착한 탓이다. 본질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현상은 쇠락의 조짐이다.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도 거리가 멀다. 신앙을 싹틔우던 순수한 초심을 되새길 때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