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원더(wonder)’에는 안면 기형의 어기라는 소년이 나온다. 어기는 유전적 영향으로 안면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자신의 독특한 외모를 우주인 헬멧으로 가리고, 학교에 가지 않으며 집에서 어머니에게 배우며 자랐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스물일곱 번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몸이 튼튼해지고 당분간은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될 때, 어기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기의 외모를 낯설어하는 아이들은 ‘괴물’ ‘좀비’라고 부르며 전염병 놀이를 했다. 어기와 접촉한 뒤 30초 이내에 손을 물로 씻거나 손 세정제를 찾아내지 못하면 전염병에 걸린다는 식의 놀이였다.
친구들의 거친 반응에 어기는 ‘함께’라는 뭍으로 나오지 못하고 ‘홀로’라는 섬으로 들어갔다. 그때 어기를 뭍으로 나올 수 있게 다리를 놓아 준 친구가 등장한다. 서머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다. 그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낯선 어기의 얼굴을 마주하며 식사하기가 거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식사한다.
서머의 용기 있는 행동은 집단으로 따돌림을 하던 아이들의 당연함이라는 연못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자신들만이 정상이라는 좁은 경험과 다름에 대해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던 마음의 비뚤어짐이 친절이라는 성숙한 친구를 만나자 부끄러움을 느끼며 옳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것이다.
친절하다고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친절하다고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친절은 다만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귀찮고 슬쩍 외면해도 아무도 모를 순간에 옳은 방향으로 자신의 첫발을 내딛는 정직한 용기인 것이다.
영생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종교적 주제를 놓고 자신을 찾아온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신다. 비유의 내용인즉슨, 고작 당대에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에게 베푼 친절한 행동이었고, 결론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였다.(눅 10:37) 그러면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고, 네가 원하는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
왜 이런 비유를 드신 것일까. 율법 교사가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웃의 범위를 내가 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가 네 이웃이라고. 그리고 그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라고.
존 프리처드는 책 ‘교회’에서 우리가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신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낯선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대하고, 자신과 사뭇 다른 정치적 견해와 신학적 관점을 지닌 이와 한곳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써 오늘날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무언가를 구현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마우 역시 책 ‘무례한 기독교’에서 교회가 홀로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의를 배우는 1차적 장이 됐을 때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가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과연 인류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준비하는가. 우리는 신뢰를 얻는 사람들이 돼 가는가. 옳음을 주장하고 평안을 확보하느라 우리의 갈 길만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라는 강도를 만난 이들이 쓰러져 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는 그만 묻자. 친절할 때다.
성현 목사(필름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