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2월 전역했다. 좋은 분들께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세상도 그럴 것 같았지만,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당장 취업 문이 바늘구멍처럼 좁았다. 여덟 군데에 이력서를 냈지만,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환경관리사가 유망하다고 해 학원에 등록해 자격증을 땄다. 이 자격증으로 동아제약에 입사했다. 생산부서에서 2년간 일했다. 동료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다. 동료들과 대화하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사에 허락을 받아 신우회를 조직했다. 나는 초대회장으로 일했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79년 8월 9일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던 나는 이날 신민당에 입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포 신민당사에 도착하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YH 사건’ 현장이었다. 가발을 만들던 YH무역이 폐업조치를 하자 여공들이 항의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다 농성하던 여공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통해 공권력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봤다. 무기력해졌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심장까지 망가졌다. 협심증과 서맥증이 왔다. 심장 박동이 분당 60회 미만으로 느려지는 병이었다. 웅변에 능했지만, 숨이 차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워졌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던 분들이 떠올랐다. 김홍태 목사님의 간절한 권유가 특히 생생하게 기억났다.
“죽기 전에 신학교에 들어가자. 그렇게 많이 권유받았는데, 까짓것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서울장신대 야간과정 2학년에 편입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자 마음이 편해졌다. 심장병도 자연스럽게 나았다. 나의 활발한 성격은 신학교에서 더욱 빛났다.
목회선교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동아리는 민주화 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그곳에서 송유성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재판에 넘겨졌다. 그 친구가 판결을 받을 때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판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의 우렁찬 목소리가 법정을 갈랐다. “나는 비록 영어의 몸이 되지만 제2, 제3의 민주투사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는 결국 2년간 옥살이를 했다.
가슴에 불을 지르는 일갈이었다. ‘민주 투사가 되리라’고 다짐하고 그날부터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문턱을 넘었다. 여기서 민주화운동에 인생을 바친 여러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만나 교제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민주화 투사를 꿈꾸며 살아가던 어느 날,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피상적으로 알던 예수님이 내 마음 깊이 들어왔다. 81년 10월 3일의 일이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