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2차 팬데믹이 시작됐다. 어제는 코로나 확진자가 전국적으로 400명에 육박했다. 교회와 카페발이지만 식당, 요양시설, 학교, 관공서, 공장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감염이 발생하고 있다. 1차 때와는 달리 감염원을 알 수 없는 ‘깜깜이’ 확진자, 아무런 증상이 없는 무증상 확진자가 넘쳐난다. 해외 사정도 다르지 않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우 3000~4000명, 독일은 1500명의 확진자가 매일 보고되고 있다. 순항하던 K방역이 거대한 암초를 만났다.
암초에 부딪히니 종교집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1차 때는 신천지였고 이번 2차는 사랑제일교회다. 신천지는 수개월에 걸쳐 총 5214명이 감염됐고, 사랑제일교회 관련 감염자는 2주 만에 800명을 넘었다. 비상식적 예배 관행이 방역지침을 무력화했고 이내 두 집단은 국민의 공적이 됐다. 사랑제일교회는 ‘아스팔트 우파’라는 정치적 이념이 덧씌워져 독특한 집단적 정체성을 만들었다. 전세버스에 몸을 싣고, 8·15 광복절을 기회 삼아 광화문에 집결했다. 이 집단적 ‘과업’의 정점에 전광훈 목사가 있다. 온갖 기행과 억지 그리고 요설의 주인공이다.
전 목사의 잘못은 끝이 없다. 선량한 신도들을 종교적 ‘인질’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종교지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망각한 채 신도들을 이념적 고립무원으로 밀어 넣었다. ‘종북좌파’ 대통령과의 ‘성전’에 참여하라고 주술을 걸었다. 이렇게 고무된 신도들에게 고열 증상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 후는 우리 모두 아는 대로다. 사랑제일교회 신도들은 대유행의 원인 제공자로, 표현의 자유 남용자로, 구속영장 집행대상으로 전락했다.
다들 마음이 편한가? 대유행의 원인을 찾아내서? 우리가 ‘정상적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반드시 그렇진 않을 거다. 2030 중심의 신천지 교인은 내 자식 같고, 장년 중심 사랑제일교회 교인은 내 부모·형제, 이모·삼촌 같이 느껴질지 모른다. 혹시 우리 사회가 급격히 ‘좌향좌’로 향하고, 장노년층의 정치적 참여가 단절되면서 이들의 박탈감도 덩달아 커진 게 아닐까?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의 나라, 세대통합은 과거의 유물이 된 이 나라에서 이들은 일종의 실존 위기,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전광훈이란 카리스마 앞에 이들은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가?
1차 유행의 원인이 외국인 전파, 집단요양시설 감염, 다중시설 확산 등 지역사회 움직임에 있었던 것처럼, 이번 2차 유행의 원인 역시 복합적이다. 적지 않은 방역전문가와 양심세력은 정부의 안이한 방역태세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성장률 전망치 세계 1위 성적표를 받아든 정부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방역의 고삐를 너무 빨리 풀었다는 설명이다. 성급하게 내수진작에 나서 휴일을 늘렸고 외식·공연 할인 쿠폰을 뿌려 외출과 소비에 앞장섰다. 잘못된 시그널은 이렇게 퍼져갔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경고와 교회발 확진의 엄중함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유체이탈된 ‘사회적 거리두기’는 결코 쉽게 돌아올 리 없다.
사랑제일교회발 확진자 비율이 급등하고 있는 현실은 그 연유와 과정을 떠나 교회 구성원들에게 강한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우고 있다. 궁색하게 변명하고 반발할 게 아니라 대한민국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중하고 협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전 목사는 이 모든 사태를 책임지고 결자해지해야 한다. 과도하게 정치화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이제라도 교인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어떤 자리에도 연연하지 말고 신 앞에 겸허한 종교인으로 거듭나길 촉구한다.
정부 여당의 강력 응징 천명은 우려스럽다. ‘우파 테러’라는 시퍼런 정치구호도 나왔다. ‘전광훈 방지법’과 제2의 ‘8·15 광화문 집회’ 방지 법안도 발의됐다. 집권여당이 단호히 국민 생명을 지켜주길 바라지만, 혹시 이러한 대응이 과도한 편 가르기는 아닌지, 의도치 않은 희생양을 만드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선량한 비협조자’는 어느 집단에도 있다. 이들을 코너로만 몰 게 아니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설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방역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혹시 장년 세대의 정치적 소외와 실존적 상실감이 이 사태의 뿌리는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좀 더 품격있는 방식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켜 달라.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