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변곡점이 여러 차례 있었다. 군대에 간 것도 그중 하나였다. 시력이 좋지 않아 현역 입대가 어려웠지만,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무사히 통과해야 했는데, 문제는 시력검사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시력검사표를 보고 또 봤다. 외우기 위해서였다. 꼼수를 부려 군대에 안 가려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반대였다. 시력검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신체검사 합격통지를 받았다.
당시 사병 복무기간은 34개월이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육군대학으로 배치받았다. 군 생활이 즐거웠다. 적성에 맞았다. 나는 장군 당번병과 정훈병을 거쳐 군종병으로 활동했다.
육군대학교회에서 김홍태(90) 목사님을 만났다. 당시 군목이던 김 목사님의 계급은 중령이었다. 내게는 영적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이 분을 통해 참 목사의 모습을 봤다. 1958년 군목으로 임관해 81년 전역하신 김 목사님은 “군 선교에는 은퇴가 없다”면서 여전히 군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신다. 전역 직전 교회가 없던 국방대학원 강의실에서 군 교회를 개척하셨다. 그곳에서 민간인 사역자로 2002년까지 목회하셨다. 김 목사님은 내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이 목회 여정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실제 김 목사님은 육군대학교회에선 1530명, 국방대학원교회에선 2500명을 전도해 복음의 결실을 보셨다. 나는 늘 김 목사님을 성자라고 부른다. 이런 분 곁에서 군 복무를 한 건 내겐 큰 축복이었다.
군 복무 중 육군대학 교수로 계시던 이필섭 장로님도 만났다. 대장으로 예편하신 이 장로님은 당시 대령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장로님은 제대 후에도 군 선교 활동을 하셨다. 한국기독군인연합회와 세계기독군인연합회의 회장도 역임하셨다.
당시 중령으로서 대대장이던 윤항중 장로님과의 만남도 특별하다. 훗날 소장까지 진급하신 윤 장로님은 서울 광림교회에서 장로가 된 뒤 일산으로 이사 오셔서 내가 시무하던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출석하셨다. 윤 장로님은 나를 특별히 아껴주셨다. 요즘도 나를 만나면 이러신다. “정 목사님을 만나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한 일이다.
군대에 안 갔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결국, 모든 게 주님이 예비하셨던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을 잘 따랐던 것뿐이었다. 시력검사표를 외워서 입대한 군대에서 나는 좋은 신앙의 멘토들을 만났다.
교회 관리집사였던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살면서 안 봐도 될 걸 너무 많이 봤다. 교회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목사와 장로에 대한 존경심도 별로 없었다. 이랬던 내가 군에서 참 목사와 장로를 만나 편견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