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트럼프 진영의 기수로 나선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는 1942년생, 미래통합당을 이끄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바이든보다 두 살 많은 1940년생이다. 확실히 노구(늙은 몸)인데, 둘 다 노익장(늙었지만 의욕이나 기력은 좋아짐)을 과시하고 있다.
‘치매 노인’이라는 공격을 받을 정도로 고령이 약점인 바이든은 1964년생 흑인·인도계 여성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나이와 인종, 성별에서 바이든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인물이어서 그의 약점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와 민주당은 반트럼프 총결집에 나서 공화당 지지층에게까지 손을 내밀고 있다.
다음 달 3일 취임 100일을 맞는 김 위원장은 최근 통합당 지지율 개선과 함께 존재감이 커졌다.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회동에 적극적이고, 여당 의원들의 공격이 거세진 것을 보면 그렇다. 김 위원장이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선 ‘표 구걸 신파극’ ‘화제 전환용 쇼’라는 비판이 나왔다. 또 김 위원장이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찾아가 면담한 것을 놓고 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노욕 정객이 셀프 대권 놀이만 즐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민주당 당권 주자 합동연설회에선 “김 위원장을 끌어내려야 한다”(이원욱 최고위원 후보)는 주장까지 나왔다.
김 위원장이 지난 4·15 총선에서 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는 유세 중 당명을 헷갈리는 말실수로 조롱거리가 됐다. 너무 나이가 들어서 4년 전 자신이 지휘했던 민주당과 새로 맡은 통합당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빈정거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 모습이다. SNS에선 김 위원장의 ‘5·18 무릎 사과’를 두고 “무서운 할배다” “통합당에 사람 없으면 그냥 본인이 차기 대선에 나오면 된다”는 세평이 나왔다. 그의 오랜 경륜과 정치 감각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가 지난 3월 펴낸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보면 그의 정치인생 반세기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검프가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기듯, 책의 주인공 김종인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마치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경제가 김종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회고에 ‘자뻑’(자기도취)이 가득해서 재미있기도 하다. 그 스스로도 책에서 “정치인들은 그 시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말하길 즐긴다. 어쩌면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살짝 인정한다. 그가 추진했던 근로자 재형저축과 사회의료보험,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조치,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 인천공항·KTX 건설 등은 모두 잘된 일이었고 그가 아니라고 했던 정책들은 결국 본인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식이다.
그의 전성기는 노태우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북방 정책과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을 추진했을 때였던 것 같다.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그의 서술을 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가장 호의적으로 묘사돼 있다.
김종인의 현란한 자기 자랑을 보다보니 ‘위대한 남성 나르시시스트’(GMN)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미국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 작가 존 업다이크를 GMN으로 일컬으면서 시대 변화에 뒤처져 불쾌해져만 가는 그의 후기 작품을 지독하게 혹평했다. 김종인은 어떻게 될까. 업다이크 꼴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를 잘 포착해 제2의 전성기를 열 것인가.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