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당한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69세’의 효정은 단단하다. 세상의 갖은 수모에도 예순아홉 효정은 자신의 존엄을 위해 용기있는 걸음을 내디딘다.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이 작품에 생생함을 더하는 건 주인공 효정 역의 예수정(65)이다. 그는 작은 주름 떨림 하나로 효정의 신산한 삶을 스크린 너머로 전한다.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대중과 호흡하는 예수정을 최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20일 개봉한 ‘69세’ 말고도 그는 최근 국립극단 70주년 신작 ‘화전가’의 주역 김씨로도 팬들을 만났다. 한국전쟁 직전 경북 안동에서 아홉 여인의 평화로운 한때를 그린 ‘화전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으로 18일 막을 내리기 전까지 전석 매진되며 화제를 모았다. 예수정은 “바이러스에 장마도 겹쳐 마음이 바쁘긴 했는데, 연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연기는 언제나 내게 핑계 있는 안식처”라고 했다.
“평소 제 삶은 상당히 개인주의적이에요. ‘내 머리카락이나 잘 줍자’는 생각이죠. 소수 약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흔드는 작품을 찾고 또 연기하는 건 어른이자 배우로서 ‘면죄부’를 사는 느낌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국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성폭행 피해 노년 여성에 초점을 맞춘 ‘69’세에 출연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20대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을 입은 효정은 경찰에 신고하지만, 되레 치매 환자라며 모욕을 당한다. 꿋꿋한 효정의 삶을 진득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는 예수정을 사로잡았다.
“유기체인 인간은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작품에서 ‘노년’은 녹슨 자전거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요. ‘멈춤’의 은유처럼 보이죠. 굳이 황혼 로맨스에 집착하는 작품도 많고요. ‘69세’는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노년의 삶 중 하나를 깊이 탐구하는 흔치 않은 작품이에요.” 예수정은 임선애 감독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로맨스 라인을 걷어내는 등 영화를 더 현실적인 노년의 이야기로 다듬었다.
‘화전가’는 대본을 읽기 전 출연을 결심했다. 연출을 맡은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배삼식 작가 모두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신뢰를 쌓은 동료들이어서다. 예수정은 “몇 번을 읽어도 암호문 같은 안동 사투리를 외우느라 애먹었다”면서도 “70주년 기념공연으로 미래를 향해 신작을 올리겠다는 의지가 인상 깊었다”고 했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로 익숙한 배우 정애란의 딸인 그는 1979년 연극 무대로 데뷔했다. 이후 칠레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어둠을 그린 ‘과부들’, 위안부 문제를 다룬 ‘하나코’ 등 여러 수작에 출연했다. 그에게 무대는 40여년 동안 “공동체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공론장”이었다.
그는 예순 안팎에 ‘도둑들’을 시작으로 ‘부산행’ ‘신과함께’ 1·2편 등 4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어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와 오는 31일 처음 방송되는 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선 잇따라 강인한 대기업 대표 역할로 대중문화 속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이전 여성에게는 엄마·할머니·딸로서의 역할이 먼저 씌워졌었는데 세상이 변하고 있어요. 검블유 촬영하면서는 정말 속이 시원하더라고요(웃음). 이제 여성 배우 앞에 ‘여성’ ‘노년’ 같은 불필요한 수식어도 사라져야죠.”
공연계 어른으로 후배들과 교감하는 예수정에게 ‘69세’는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을 해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예수정은 인터뷰 말미 코로나19 확산 우려 속 진행된 최근 광화문 집회에 대해서도 뼈있는 말을 덧댔다.
“나쁜 말을 쓰면서 공동체 전체의 삶을 위협하는 걸 보면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아는 게 진짜 어른 아닐까요.”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