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백신 내셔널리즘

입력 2020-08-21 04:03

사람의 진면목은 위기가 닥쳤을 때 드러난다. 평소 이타적으로 보였어도 위기 앞에선 나부터 사는 게 본능이다. 국가라고 다를까. 지구촌이 코로나19 팬데믹에 빠지자 세계 각국은 너나 할 것 없이 문부터 걸어잠갔다. 국경을 허물어 자유왕래를 보장했던 유럽연합(EU)도 솅겐조약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렇듯 상황이 어려울수록 국가주의, 민족주의 사조가 맹위를 떨친다.

코로나19 확진자는 전 세계적으로 2000만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는 80만명에 육박한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공포에 떨고 있다. 더 무서운 건 아직 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둘 중 하나만 개발돼도 상황이 훨씬 나아질 텐데 언제 나올지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7월 말 현재 세계에서 160여개의 백신 후보 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 미국의 모더나와 화이자, 독일의 바이오엔테크, 중국의 시노백바이오테크와 캔시노바이오로직스의 6개 물질이 임상 3상시험 중이다. 지금까진 아스트라제네카가 가장 앞섰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주장한 스푸트니크V는 인정을 못 받고 있다.

백신 개발은 요원한데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백신 사재기에 뛰어들고 있다. 효능은 다음 문제고 일단 쌓아 두자는 심산이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이 입도선매를 통해 확보한 물량이 30억회분에 이른다고 한다. 백신이 개발돼도 생산량은 제한적인데 선진국들이 싹쓸이하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차례는 없다. WHO가 백신 내셔널리즘에 강한 우려를 표시한 이유를 알겠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백신은 최고 입찰자가 아닌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급돼야 한다”며 “우리는 시장논리가 아닌 평등에 기반해 어려운 분배 결정을 내릴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말이야 맞는데 과연 이 말을 따를 지도자가 있을지….

이흥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