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입맛의 성장

입력 2020-08-21 04:06

작년 여름 십오년째 이어지던 직장생활을 접었다. 올 초엔 난데없는 역병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외출이 대폭 줄었고 외식도 확연히 줄었다. 덕분에 근래의 나는 끼니마다 요리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그런 나의 애정도가 급상승한 식재료가 있다.

그것은 대파다. 대파는 우선 저렴하다. 이따금 장을 보러 가서 대파를 사 오는데 가격 대비 만족도가 무척 높다. 줄기는 우렁차고 잎사귀는 푸릇하고 아직 신선한 흙냄새가 감도는 대파 한 단을 쥐고 돌아오면 손아귀가 뿌듯하다. 그리고 대파는 오래간다. 먹는 입이 하나인 1인 가구에서 푸성귀를 대량으로 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금세 물러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파는 기본적으로 강인하여 냉장고에서도 상당한 시간을 버틴다. 냉동실에 넣어두면 시간이 멈춘 듯 하염없이 푸르고 말이다.

덕분에 나는 온갖 음식에 대파를 넣는 지경에 이르렀다. 떡볶이, 라면, 고깃국, 볶음밥…. 달큰하면서도 알싸한 향, 아삭하게 씹히는 겹겹의 섬유질은 어느 음식에나 얼추 어울린다. 얼마 전 바글바글 끓는 김치찌개에 대파를 푸짐하게 넣고 어쩐지 아쉬워 한 움큼 더 넣으며 문득 생각했다. 어라, 나 어린 시절엔 대파를 무척 싫어했던 것 같은데.

분명 그랬다. 나는 국에 파가 떠 있으면 후 불어 귀양을 보내는 아이였다. 대파와 사촌지간인 양파도 싫어했다. 제육볶음에 양파가 있으면 비곗살인 줄 알고 씹었다가 인상을 쓰곤 했다. 놀랍게도 대파와 양파는 요즘 내가 가장 아끼는 채소들이다. 마늘은 또 어떤가. 맵고 쏘는 맛에 무조건 도리질했던 그 하얀 낱알들을 지금 나는 으적으적 잘도 먹는다. 나물도 마찬가지다. 쌉쌀하고 떫어서 저걸 무슨 맛으로 먹지 싶었던 고사리, 도라지, 미나리 모두 이제는 계절마다 찾아서 먹는다. 깻잎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엔 숭숭 돋은 솜털과 묘한 향이 공연히 싫었는데 이제 난 닭갈비에서 깻잎부터 집어 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변화를 두고 다들 그랬다. ‘너도 나이 들었구나.’ 어린 시절 못 먹던 음식을 먹게 되는 것, 나아가 사랑하게 되는 것은 많은 이들이 겪는 통상적인 변화였다. 나 역시 ‘보편적인 어르신 입맛’을 장착하게 된 것이다. 이런 테이스트의 변모가 나이 듦의 상징으로 여겨지자 나는 다소 시무룩해졌다. 갓 태어나 생생함을 간직했던 혀가, 좋고 싫음이 명확했던 혀가 이제는 아무거나 넙죽넙죽 감아 삼키는 지경에 이르다니 입맛이 늙어버린 것일까? 어쩌면 과학적으로 정말 미뢰에도 노화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린 날의 편식을 돌아보니 그랬다. ‘파’가 붙은 녀석들은 매워서 싫어했다. 사실 그 친구들을 잘 구우면 눅진하니 달콤한 맛이 났음에도 말이다. 초록빛이 강한 녀석들은 써서 싫었다. 그 쌉쌀함을 혀 밑에 감춰두고 코에 집중하면 다채로운 풀 내음이 감도는데도 말이다. 파프리카는 고추처럼 생겨서 싫었다. 일단 그렇게 생긴 녀석들은 먹어봤자 맛없을 게 뻔하다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최초의 인상이 강렬해 재판단의 여지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선입견을 거두고 본래의 맛을 살피기보다 무조건 배척하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근래 맞이한 입맛의 반전은 오히려 경험치의 확장이었다. 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며 다면성을 익혔다. 생양파는 눈물이 나게 맵지만 달달 볶으면 캐러멜마냥 달콤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복잡한 사건을 겪으며 인생의 쓴맛을 보았다. 맥주는 분명 쓰지만 그 씁쓸함도 하나의 ‘맛’이고 넘기고 나면 코끝이 아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취향이 외곬이 되고 더는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다채로움에 너그러워지고 싶다. 최초의 판단에 갇혀 무조건 싫어했던 어떤 것의 미덕을 뒤늦게라도 눈치채고 싶다. 어린 시절 수없이 남겼던 부추, 가지, 당근, 버섯을 지금 이렇게 좋아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