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나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흥미가 없으니 공부를 잘할 리 없었다. 대신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국어 국사 사회 지리 과목은 잘했다. 나머지 과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학 영어 과목 시험을 볼 때 백지를 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반장을 했다. 교회에서도 늘 회장을 맡았다. 리더십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공부는 못해도 주변에 친구가 끊이질 않았던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건 따로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3살 위 형을 따라 태권도 도장을 다녔다. 문무관이라는 곳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무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태권도를 시작한 뒤에야 알게 됐다. 주먹에 자신이 생기다 보니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도장에서 승급 심사가 있던 날이었다. 3분 동안 상대와 겨루기를 하면 됐다. 나는 시작부터 상대를 쉬지 않고 공격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잠시 후 사범이 달려와 날 잡았다. 그렇게 심사는 끝났다.
그런데 관장이 손짓으로 사범을 부르는 게 아닌가. 잠시 귓속말을 했다. 사범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내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성진아, 너 내일부터 도장 나오지 말아라. 무술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너에게는 무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구나.”
도장에서 쫓겨난 뒤에도 학업에는 취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 사이 청량공고에 진학했다. 공부에는 여전히 취미가 없었지만, 글쓰기는 좋아했다. 학예부장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졸업식 때도 송사, 답사를 도맡아 쓰고 낭독했다. 그때 갈고 닦은 글쓰기 실력을 목사가 된 뒤에도 잘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3학년 2학기가 돼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마지막 시험에서 2등을 할 정도로 학업 성취도가 높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목표를 높게 잡았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물론 기초가 부실하다 보니 합격은 요원했다. 삼수하던 중 포기했다.
입시 준비를 하면서 무술도 다시 시작했다. ‘뫄한뭐루’라는 격투기 도장에 등록했다. 공격적인 무술이었다. 나는 빠르게 기술을 습득했다. 사범을 따라 도장 깨기를 다녔을 정도로 성장했다. 어느새 뫄한뭐루 서울 도장 유단자 1호가 됐다.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중에는 늘 후배들을 거느리고 무술을 연마했다. 그렇다고 주먹을 쓰는 깡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훗날 뫄한뭐루 창시자가 희한한 종교를 만들었다. 그때 무술을 그만뒀다.
대학 입시를 포기한 뒤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나는 군목이던 김홍태 목사님을 만났다. 그분의 삶과 신앙은 지금까지 내게 큰 본보기가 된다. 훗날 신학을 시작하게 된 데도 그분의 영향이 컸다. 제대한 뒤 당시 2년제였던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입학했고 1981년 졸업한 뒤 서울장신대에 편입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