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25전쟁 후 서울 성북구 상월곡동에서 주택 24채를 지으셨지만,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부도가 나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난리를 마무리 짓지 않고 고향 안산으로 돌아오셨다.
대신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서울로 보내셨다.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고군분투 끝에 모든 걸 수습하셨다. 남은 건 아버지가 지은 집 중 단 한 채뿐이었다.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와는 그때부터 완전히 떨어져 지내다 1980년이 지나서야 잠시 가족과 교류했다.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셨다. 집에서 3㎞ 떨어진 장위동 장석교회를 다니셨다.
나도 15살까지 이 교회를 다녔다. 그러다 부목사이던 이인구 목사님이 장위중앙교회를 개척하시면서 우리 가정을 비롯해 모두 7가정이 이 목사님을 따라 교회를 옮겼다. 이때가 69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전 재산인 집을 파신 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두 장위중앙교회에 헌금하셨다. 그리고는 교회 관리집사가 됐다. 우리는 그날부터 교회에 딸린 작은 방으로 이사했다. 누나들은 출가했고 큰 형을 제외한 3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시에는 온 가족이 관리집사였다. 함께 교회를 청소했던 기억이 난다. 본당 높이 설치돼 있던 벽시계가 항상 문제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고쳐야 했는데 처음에는 무섭더니 나중에는 서로 올라가겠다고 해 큰 형이 순서를 정해줬다. 토요일이면 교회학교를 위한 천막을 세우고 의자도 옮겼다.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삶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보다 가난했다. 가난이 흠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신실하셨고 기도하는 분이었다.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교회를 섬기셨고 우리를 돌보셨다.
아버지가 야속할 법도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탓을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늘 편을 드셨다. 아버지가 단정하신 분이고 남을 비난할 줄 몰랐다는 사실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됐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버지 10살 때 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때부터 계모 아래 자라며 사랑을 못 받았다. 사랑을 못 받아 이런 것이니 너희가 이해해 달라.” 이래서일까. 우리는 모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다. 어머니가 증오와 미움, 아픔을 신앙으로 덮으셨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는 항상 두통을 달고 사셨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진통제인 ‘명랑’ ‘뇌신’ 등을 늘 드셨다. 약을 드시면서도 하루에 꼭 2시간씩 기도하셨다. 우리 형제자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기도하셨다. 그 기도가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86년에 돌아가셨다. 정말 많은 분이 오셔서 어머니를 추억하셨다. 친구들도 와서 무릎 꿇고 흐느꼈다. 학창시절, 가난 때문에 학비를 가장 늦게 내던 나였지만 구김살 없이 자란 건 모두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다.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