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언어를 부패시키고, 타락한 언어는 우리를 눈멀게 한다. 요즘 정치 현실을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좌파 운동권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개혁을 외쳤지만, 개혁의 결과는 피부에 와닿지 않고 여전히 개혁의 말들만 난무한다. 말과 현실이 겉돈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말은 천박해진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출마한 한 의원의 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이원욱 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두고 “임명받은 권력이 선출 권력을 이기려고 한다.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라고 말했다. 정치인의 가벼운 말은 흘려버려야 마땅하다.
‘민주’를 내세운 정당과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정말 부족하다. 이 정권은 검찰 개혁을 외칠 때마다 내세운 것이 바로 권력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였다. ‘민주’는 사실 당명으로 내걸 정도로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데다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권력을 ‘통제’한다니 ‘민주적 통제’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사람들은 민주적 통제가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좋게만 생각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 경찰, 검찰을 통제한다니 국민을 괴롭히는 깡패 기관을 통제하는 것쯤으로 우리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윤 총장을 끌어내려야 검찰 개혁을 완수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의심이 여름 장마철 잡초처럼 끈질기게 쑥쑥 자란다.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으로 검찰을 활용했던 것이 이 정권의 선출 권력 아니었던가? 윤 총장을 임명하면서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고 당부했던 것도 선출 권력 아니었던가? 권력을 쥔 좌파 기득권 세력에 불리한 수사를 한다고 검찰총장을 겁박하는 것도 이 정권의 선출 권력 아닌가? 이런 의문으로 국민이 검찰 개혁의 실상에 관해 아리송해하는 차에 한 의원의 천박한 발언이 분명한 대답을 제공한 것이다. 검찰을 말 잘 듣는 개로 만드는 것이 검찰 개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민주적 통제인가? 민주적 통제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국민에 의한 권력의 통제가 민주적 통제다. 국민이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에 대해 직접 또는 자신을 대변하는 의원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적 통제다.
그렇지만 국민이 직접 법을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국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종종 혁명과 같은 저항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자유가 없이는 어떤 형태의 통치 권력도 존재할 수 없다. 비판과 견제, 그리고 저항이 없다면 통치권력은 순전한 폭력으로 변질된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가의 권력기관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통제는 바로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적 통제는 항상 권력 집중에 대한 견제와 저항의 성격을 가진다. 이처럼 민주적 통제는 피통치자가 통치자에 대해, 권력의 영향을 받는 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 대해, 국민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견제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와 기득권 세력이 이 단어를 사용하면 그 뜻이 완전히 변질된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권이 권력기관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은 권력기관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민주적 통제는 이렇게 독재가 된다.
누가 누구를 통제해야 하는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의 갈등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한쪽은 국민만 바라보면서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공고히 하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를 호소한다.
어느 편이 맞는가? 국민은 민주라는 언어의 혼란으로 더욱 헷갈려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판과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권력은 민주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은 실제로 폭주 기관차와 같고, 폭주는 반드시 국민의 피해로 귀결된다. 현재 이 나라의 통치 권력을 가진 세력이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독선과 독재의 권력을 통제해야 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