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3일 낮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문래역 4번 출구. 이 출구와 붙어 있는 홈플러스 영등포점이 목적지였다. 건물 측면 통로에 사람들이 오간다. OO은행 ATM기에서 자식들이 입금한 용돈을 찾아 나오는 것 같은 할머니, 지하철로 갈아타려는지 자전거를 거치대에 세워두는 할아버지, 아이가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을 이용해 장을 보려는지 바삐 걷는 젊은 주부…. 이런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조각물이 있다. 그들의 남편이거나 아들일 수 있는 ‘샐러리맨’을 형상화했지만, 모두 무심히 지나친다. 너무 높이 솟아 있어서, 혹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표정을 볼 수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이 구본주(1967∼2003) 작가의 ‘지나간 세기를 위한 기념비’(2001)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다.
#2. 같은 날 오후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편 ‘광화문 플래티넘 상가’. 이 건물 측면엔 1층 스타벅스 로고를 배경으로 구 작가의 다른 조각이 설치돼 있다. 지구를 구해 함께 솟아오르는 샐러리맨 형상이다. 제단에는 ‘일상으로부터/구본주/2003’라고 작품명·작가명·제작 연도를 알리는 표지석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속도의 시대 속에 생존경쟁하며 가정 안과 밖에서 수퍼맨적인 능력을 지닌, 사회적 통념 속의 가장들을 상징화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러고 보니 이 조각은 한손을 앞으로 쑥 내민 채 날아가는 ‘수퍼맨 리턴즈’의 그 수퍼맨 동작을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주먹을 쥐는 대신 손바닥을 펴고 있어 동작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양복도 후줄근해 사선의 동세가 주는 날렵함과 엇박자를 내며 가장(家長) 신화에 균열을 낸다.
공공 조각이 거리로 나왔을 때
공공 조각은 어디에, 어떻게 세워져 있는가에 따라 맛이 다르다. 흰 벽면으로 둘러싸인 미술관에서 예술의 아우라를 가지며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작품도 거리로 나오는 순간, 처지가 달라진다. 일상의 풍경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거치대, 알록달록한 간판 등 시선을 뺏는 다른 경쟁 요소 때문에 잡다한 도시 풍경에 묻혀버리기 십상이다. 홈플러스 영등포점의 ‘지나간 세기를 위한 기념비’처럼 말이다.
이 공공 조각의 존재감이 덜한 것은 제단의 높이 탓도 있다. 조각은 무지개처럼 걸린 반원을 제단 삼았는데, 그게 너무 높은 것 같다. 작품은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곡예 하듯 사투를 벌이는 샐러리맨의 처지를 스노보드를 탄 채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모습을 통해 형상화했다. 아슬아슬한 자세와 특유의 표정이 압권이다. 양팔을 벌린 채 뒤로 꺾인 몸체, 바람에 나부끼는 넥타이에서 절박함이 어느 정도 전해지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 작품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편의 샐러리맨 조각처럼 적당한 높이에 설치돼 관람자의 시선이 조각의 표정에 닿을 수 있었더라면 작가 의도가 보다 분명히 전달되지 않았을까. 그의 샐러리맨 조각이 지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봤더라면 작가 구본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구본주(사진)는 요절한 작가다. 고흐가 그랬듯, 라파엘로가 그랬듯 37세에 세상을 떠났다(전시를 준비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보험사가 고인에게 적용한 보험금 기준이 ‘도시 일용직 노동자’인 것으로 알려지며 문화 이슈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짧은 생애 동안 화산 같은 열정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구본주의 독보적인 점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샐러리맨을 조각의 대상으로 끌어왔다는 데 있다. 1986년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해 흙과 철, 나무를 주물렀던 그가 처음 다루던 소재는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미대 재학시절부터 소위 ‘운동권 미술’을 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그는 선배 민중미술 작가들처럼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뤘던 것이다. 마침내 각성해 사회 변혁의 대열에 선 결기 있는 표정의 농부, 깃발을 든 노동자를 흙으로 빚었다. 동학농민운동 때 죽창을 높이 세웠을 역사 속 민중의 얼굴도 소환했다. 1995년 첫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미 미대 재학시절부터 민주화 욕구가 분출되던 시대적 흐름을 타고 ‘학생 작가’로 활동했던 것이다. 한때는 수원에 내려가 1년여 현장미술 운동에 몸담기도 했다.
민중미술 조각의 아이콘이 된 샐러리맨
그가 자본가에 기생하는 계급 취급 받던 샐러리맨에 처음 눈길을 준 것은 1987년의 민주화항쟁이 계기가 됐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이 이끌던 시위 대열에 넥타이 부대들이 합류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데 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이후 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련도 사라지는 등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며 한국의 사회 운동 세력은 ‘멘붕’(멘탈 붕괴)을 겪어야 했다. 구본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내 전미영씨는 “90년대 들어 문민정부 들어서고 이른바 386세대들이 언론, 대기업, 증권사 등 각 분야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샐러리맨 군상들이 갖는 에너지를 본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구본주가 형상화한 샐러리맨의 이미지에는 짙은 페이소스가 있다. 문민정부가 추구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생존경쟁은 치열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샐러리맨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얼굴은 측면에서 눌러 짜부라진 듯 길쭉해지고 무릎은 비정상적으로 꺾인 채 허겁지겁 내달리는 특유의 샐러리맨 조각이 등장한 것은 91년 무렵부터다.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길을 달려가는 ‘벅찬 출근’(91년), 바바리 차림으로 한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배 대리의 여백’(93년) 등은 영화의 한 장면, 만화의 한 컷을 보는 것처럼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형상은 점점 과장되고 왜곡됐다. ‘이 대리의 백일몽’(95년) ‘미스터 리‘(95년) 등을 보자. 죽어라 눈치 보며 달려가느라 목은 학처럼 늘어나고 무릎은 기형적으로 꺾인 채 날아가는 것 같다. 숨을 헉헉 거려 입은 헤벌어지고 동공은 무엇에 놀란 듯 커져 있다. 쫓는지, 쫓기는 지 모르는 채 달려가는 샐러리맨의 자화상이 거기 있다. 급기야 얼굴은 완전히 짜부라져 숫자 1처럼 되고, 양복을 입은 비대한 몸통은 속이 텅텅 비어 있고, 목은 끈처럼 길게 늘어나 자신의 뒤통수를 슬프게 쳐다보기도 한다. 이 왜곡과 과장이 샐러리맨의 삶의 실체에 더 가깝다니 아이러니컬하다.
샐러리맨에서 아버지의 초상으로
샐러리맨 연작은 98년 외환위기를 고비로 한 번 더 변신한다. 당시 살인적인 고금리로 기업은 줄도산하고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했다. 졸지에 거리로 쫓겨난 가장들. 이런 아버지들에 대한 연민 때문인 듯, 2000년대 들어 제작된 작품들은 샐러리맨 일반보다는 가장의 비애에 더 초점을 맞춘다. 전봇대에 기대서서 한손으로는 담배를 쥔 채 다른 손으로 볼일을 보는 남자의 초상을 보노라면 웃다가도 슬픔이 밀려온다.
그의 작품 세계를 ‘샐러리맨의 영웅화’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쿠르베가 귀족이 아닌 노동자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리얼리즘 혁명을 일으켰듯이 구본주는 우리 시대 중간계급 샐러리맨을 제단 위에 세웠다. 내 생각엔 영웅화라기보다는 사회 고발에 가깝다. 길쭉하게 형상을 왜곡하는 일러스트 기법의 캐릭터를 도입함으로써 대중에게 친근함을 주는데도 성공했다.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탁월한 조형 능력은 조각의 표정에서 빛난다. 그 표정을 봐야 구본주의 샐러리맨 조각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다.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에서 구본주 개인전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과장의 이야기-아빠 왔다’에서 그 표정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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