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코로나 블루’가 하나의 보편적 병증이 돼 버렸다. 늘 긍정적이던 가까운 지인들도 자주 우울감을 호소한다. 설부터 시작된 전염병이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을 제한한 결과다. 하여 가라앉은 마음을 극복하고자 작게라도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경우는 평생 키워보지 않은 작은 허브들을 하나씩 방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즈마리와 바질을 ‘데려왔다’. “드디어 너도 식물집사가 되었구나!” 카카오톡 사진을 보더니 동창생이 깔깔 웃는다. 식물들 시중을 드는 사람을 말하는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른 아침 일어나서 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흙은 아직 마르지 않았나, 잎이 시들지는 않았나, 혹시 벌레가 생기지 않았나 조심스레 만져도 보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신기하게도 그 일이 설렌다. 그러다 ‘아이들’이 하루 사이에도 살짝 자라있는 모습이 느껴지면 여간 기특한 것이 아니다. 용기를 내어 애플민트도 데려오고 홀리페페 화이트스타… 이러다 작은 내 방이 식물원이 될 판이다. 그래도 사회적 거리와 상관없이 가까이 가서 만지고 냄새 맡고 쓰다듬어줄 생명체가 있다는 것이 꽤나 큰 위로가 된다.
학교 동료 선생님 한 분은 오십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덕질’로 우울감을 극복 중이라고 한다. 덕질은 표준어도, 점잖은 언어도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그 단어 외에는 동료 선생님의 근황을 설명할 적절한 단어가 없다. 목사님 딸로, 학교 선생으로, 성실한 어머니로, 평생을 모범생으로 학교 집 교회만 맴맴 돌던 선생님은 최근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조성된 성악 4중창단에 빠져 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고 재미있어서 웃었는데, 그 열정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대화의 주제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중창단 이름 ‘라비던스’다. 존에 바울까지, 성경적 이름을 가진 신앙인 젊은이들이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음악 장르를 넘나들며 실력은 물론 매회 실험정신을 발휘하는 자유 영혼에 매료됐다고 한다.
얼마나 칭찬이 자자한지, 나는 프로그램이 다 끝난 뒤에 늦게 유튜브로 몇 곡을 들어보았다. 평소 음악을 듣고 크게 감동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사람인데, 나도 모르게 울컥 마음이 움직이는 거다. 어라. 실력으로만 치자면 더 뛰어난 세계적 테너나 바리톤, 베이스의 목소리들도 들어봤는데, 왜 이 젊은 청년들의 화음에 마음이 열리는 걸까. 한참 생각 끝에 ‘생기’라는 결론이 났다. 기교와 루틴이 아닌, 매번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서면서도 자신들의 음악성을 생기발랄하게 표현하는 젊음이기에.
아, 우리가 이 길고 지루한 죽음의 바이러스를 이겨낼 방법을 하나 찾은 것 같다. 생기를 나누는 것, 사회적 거리로도 막을 수 없는 생명의 기운을 전달하고 받는 것. 특히 지금 내게 가능한 방법으로 자라는 생명을 응원하고 돌보는 것 말이다. 식물 키우기나 청년 중창단 응원하기 같은 소소한 일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온통 악다구니만 남은 듯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점점 늘어가는 짜증과 혐오와 비난의 소식을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조직신학자 카터 헤이워드(Carter Heyward)의 말마따나 사랑은 ‘존재의 흐름’인데, 사회적 거리 두기로 그간 익숙했던 생기 나눔이 그치니 그야말로 ‘사랑 없는 징후들’이 창궐하는 것 아니겠나.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에게 가능한 자산과 재능과 에너지와 시간을 흘러가게 하는 방법 말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비대면이든 대면이든,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바이러스의 공포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온기를 나누는 사람이려면, 하나님의 호흡인 생기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이려면….
백소영(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