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지금은 애가를 불러야 할 때

입력 2020-08-22 04:02

당혹스럽고 비통하다. 한국교회가 제2의 신천지 취급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코로나19 초기만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1~3세기 초기 교회와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섬김과 희생을 언급하며 코로나로 비탄에 빠진 이 사회를 구할 줄 알았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의료진과 미자립교회 등을 위해 재난지원금을 내놓았고, 대형교회는 자가격리자와 경증 확진자를 위해 수양관 시설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가 방역 시책에도 적극 호응했다. 지역교회에 따라서는 표준 방역수칙보다 몇 배나 강도 높은 방역으로 타의 모범이 됐다.

하지만 안타깝다. 일부 교회들에서 간간이 발생하던 확진자가 최근 2~3주 사이 수도권 지역 교회들에서 봇물 터지듯 퍼졌다. 급기야 지난 주말엔 서울 사랑제일교회에서 확진자 수백명이 속출하면서 14일 이후 엿새 동안 국내 발생자가 1000명을 돌파했다. 그간 우리 국민이 애쓴 노력이 한순간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토록 방역수칙을 준수하자고 다짐하고 실행했건만 결과적으로 교회는 이 나라와 사회에 큰 폐를 끼치게 됐다. 물론 일부 ‘문제 있는’ 교회가 초래한 분별없는 행위로 치부해 선 긋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냉정했다. 교회를 걱정하다 못해 이젠 끝 모를 증오와 혐오를 쏟아낸다.

한국교회 구성원으로서 억울한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일부 교회에서 국가 방역에 도전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노기 띤 반응 역시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성도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항변할 처지는 못 된다. 언론이 과잉 보도한다고 탓할 수만도 없다. 이 사태를 촉발한 일부 교회는 모두 한국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고,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 역시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문자적 표현으로만 보면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만물의 찌꺼기”(고전 4:13, 새번역)로 전락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코로나를 보내셨다면, 그것은 교회를 향한 것일 수 있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우리의 교만을 향한 칼끝일 수 있다.

한국교회는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더라도 달려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 옛날 신바빌로니아 시절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끌려간 유대 백성들처럼 그발 강가(Kebar river)에서 이 혼란과 슬픔을 삭여야 한다(겔 1:1, 3:15). 침묵과 근신, 회개와 애통함으로 감내해야 한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 예언자 예레미야가 쓴 성경이다. 다섯 수의 암울한 시로 짜여 있다. 혼돈과 패망의 슬픔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예언자는 모든 시를 애가로 채우지는 않았다. 한 편의 찬송시가 빛난다. “주님은 나의 희망…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욕을 하거든 기꺼이 받아들어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 돌아가자.”(3:24~40, 새번역)

다행히 한국교회 교단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코로나 확산에 대한 사과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교회마다 더 강력하게 방역수칙을 지키겠다면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면서 에스겔서를 기록했다. 교회는 이제 코로나19라는 그발 강가에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회복해 그 경험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했던 시대에 마르틴 루터가 전한 영성 상담 편지 일부를 읽으면서 오늘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을 다짐해본다.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하고 약을 먹고, 나를 보호하고 내 부주의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감염되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꼭 가야 할 곳이 아닌 장소와 사람들은 피할 것이다.… 이웃에게 내가 필요하다면 어떤 사람이나 장소도 피하지 않고 그를 찾아가 도울 것이다.”

신상목 미션영상부장 sm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