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2월 4일 어머니 윤덕희(1917~1986) 권사는 경기도 안산 도일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한 뒤 집에 와서 날 낳으셨다. 도일교회는 집안 땅 1322㎡(400평) 위에 어머니가 개척하신 교회였다.
당시 부흥회 강사는 이성봉(1900~1965) 목사였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 목사가 내 이름을 지었다. 성회 기간 중 태어난 아이라고 ‘성스러울 성(聖)’자를 사용하셨다. 내 이름이 ‘성진’이 된 이유다.
교회를 개척하실 정도로 신실하셨던 어머니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신앙이었다. 어머니는 자애로우셨다. 경기여고 출신인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꿈을 펼치지 못하셨다. 그러다 19살 되던 해, 안산 거부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아버지 집안은 당시 큰 양조장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결혼 직후 승마용 말을 사서 집에서 길렀을 정도로 씀씀이가 컸다. 필요한 게 있으면 일본으로 달려가 사 오셨다.
결혼식 날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포천까지 택시를 보냈는데, 쌀 30가마니 값과 맞먹는 택시비를 지불했다. 택시에서 내린 신부는 집 안까지 비단을 밟고 들어왔다. 어머니의 결혼은 이토록 화려했다. 하지만 편안한 삶은 길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 5년 뒤부터 밖으로 돌았다. 어머니와 사이에 4남 3녀를 두신 아버지의 자녀는 모두 11명이나 된다. 4명은 이복형제다.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탕진했다. 위로 형과 누나가 줄줄이 있던 내가 경험한 건 지독한 가난이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시편 119편 71절의 말씀처럼 살았다.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덕분이다. 가난 속에서 태어난 내게 어머니가 그토록 물려주고 싶어하셨던 것도 예수였다. 앞으로 펼쳐질 어려움을 예수만 따라 살며 극복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삶을 살았었다.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다만 중독되기 직전까지만 했다. 나의 결단으로 돌이킬 수 있는 지점까지만 경험했다. 그리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은 날 경험시켰고 단련시키셨다. 방황의 길에서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새벽, 푸른빛이 앞산 정상을 타고 넘던 시간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교회로 가셨다. 안산을 떠나던 4살 때까지 매일 이렇게 하셨으니 기억에 뚜렷하게 남은 것 같다. 어머니는 위아래로 몸을 움직이며 교회 종을 치셨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나도 흔들렸다. 새벽 종소리는 온몸을 울렸다. 거칠게 살던 시절, 마음에는 어릴 때 들었던 그 종소리가 늘 들렸다.
약력=1955년 경기도 안산 출생. 서울장신대 신학과,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졸업, 실천신학대학원대 명예 목회학박사. 거룩한빛광성교회 위임목사, 미래목회포럼 이사장, 국민일보 목회자포럼 회장 역임. 현 한국교회봉사단 이사장, 사단법인 크로스로드선교회 대표.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