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가동이 멈추자/ 하늘 푸르고 강물 맑아졌네/ 거리에 인간 소음 잦아들자/ 공기 투명해져 새들의 음표/ 더욱 높고 발랄해졌네/ 인간은 자연의 악성 바이러스/ 우리 몸 시들할수록/ 산과 들 기력을 찾네/ 사람에게 재앙인 코로나/ 자연에게 더없는 축복이라네.”(졸시 ‘코로나19’ 전문)
코로나 팬데믹과 수해 등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 피해를 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대할 때마다 ‘자연은 어질지 않다’는 노자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노자의 도덕경 5장에는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拘)’란 말이 나온다. 천지는 인(仁)하지 않고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는 의미다. 추구는 제사 때 사용하는 풀로 만든 개를 말한다. 이는 천지가 만물에 소홀하다는 뜻이 아니라 골고루 내비치는 태양 빛처럼 차별 없이 제사 후의 추구를 대하듯 무심하게 만물을 대한다는 뜻이다.
팬데믹의 장기화로 국내 코로나 누적 환자 수가 1만5761명(18일 0시 기준)에 이르고 있는데 문제는 이러한 추세가 중단되거나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생활 생태계가 교란돼 생명을 잃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적지 않은 수의 자영업자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있으며, 또 실직을 당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올여름 기상이변에 따른 유례없는 최장 기간의 장마 때문에 대한민국이 물의 나라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재해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가 날로 뜨거워지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폭염, 폭우, 가뭄 등 전례 없는 기상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요컨대 극단적인 이상기후가 전 지구적 생활환경의 물적 토대를 가차 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코로나 사태나 기상이변에 따른 재해가 인간의 역사에서 전혀 낯선 종류의 경험만은 아니다. 다만 코로나의 경우 고대 중세의 역병과는 다르게 감염 속도가 빠르고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것과 기후가 갈수록 변화하면서 기상이변 현상의 빈도수가 잦고 수량·수치 면에서 무섭게 기록을 경신해 간다는 것에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이후 자연을 타자화해 온 인간 주체 중심의 이분법적 세계관이 전 세계인의 일상을 전일적으로 지배, 생태 질서를 교란해 온 결과 그 폐해가 고스란히 부메랑이 돼 인간의 몫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형국이다. 근원적으로 세계관의 대변혁을 꾀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재앙이 일상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인 형태의 민족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칼 세이건 ‘코스모스’ 632쪽)
우주에는 수천억 별로 이뤄진 은하계 수천억 개가 있다. 지구가 소속된 은하계는 수천억 은하계 중 변방에 속한다. 지구는 그 은하계에서 변두리에 위치해 있다. 푸른 먼지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 70억 인구가 살고 있다.
각축하는 삶을 살다보면 광활한 우주의 시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우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지구는 한낱 푸른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국가, 종교, 이념, 계급, 경제, 지식체계 등 그 무엇도 지구의 재앙을 막을 수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주적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자 척도라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나(인간) 외의 타자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낮아질 때 자연과 인간의 상생은 구현될 것이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