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일본 넷플릭스 톱 10 TV 프로그램 1~3위는 모두 한국 드라마였다. 바로 ‘사이코지만 괜찮아’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이 가운데 ‘사랑의 불시착’은 지난 2월 일본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후 지금까지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형 글로벌 오디션 ‘니지 프로젝트(Niji Project)’의 흥행, 방탄소년단의 일본 정규 4집 앨범 ‘맵 오브 더 솔: 7~더 저니~’의 오리콘 차트 석권 등 K팝에 대한 일본 내 인기도 지속적이다. 2018년 12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 번역된 후 한국 출판물을 바라보는 일본 내 시선도 달라졌다. 지난 10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한·일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현재의 한류 붐을 4차 한류로 일컫는다고 보도했다.
더 넓고 깊게 확산하는 일본 내 한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17년 전 ‘겨울연가’가 중장년 여성의 지지에 치우졌던 것과 달리 20~40대를 비롯한 전 연령대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며 일본 내 유명인들의 시청평도 잇따랐다. 일본의 ‘오프라 윈프리’로 불리는 토크쇼 진행자 구로야나기 데쓰코는 인스타그램에 “재미있어요. 전 회를 한 번에 봤습니다”라고 올렸다. 배우 사사키 노조미, 올림픽 레슬링 3회 연속 금메달리스트 요시다 사오리, 후지TV 아나운서 미카미 마나 등도 ‘사랑의 불시착’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정치인들의 ‘시청 고백’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야마다 다카오 마이니치신문 특별편집위원은 지난 10일 기명 칼럼에서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에게 ‘사랑의 불시착’을 봤느냐고 물었을 때 “전부 봤다”고 답했다는 에피소드를 실었다.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부 지사 역사 방송에서 “2, 3화 정도 보고 그만둘까 했는데 16화까지 전부 보고 말았다”며 “방에 틀어박혀 보다가 자기 전 이부자리에서도 계속 봤다”고 말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재점화한 한국 드라마 인기는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로 옮겨붙었다. ‘사랑의 불시착’ 주인공 현빈이 지난 6월 16일 주간아사히 표지 모델로 나온 데 이어 지난달 14일 ‘이태원 클라쓰’ 주인공 박서준이 다시 표지 모델로 나선 것도 최근 한국 드라마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방탄소년단, 트와이스로 본격화된 일본 10, 20대의 K팝 열풍도 새로운 단계로 진화했다. JYP엔터테인먼트가 소니 뮤직과 손잡고 기획한 글로벌 오디션 ‘니지 프로젝트’는 일본판 트와이스 데뷔기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 시스템이 일본 현지에 녹아든 것이다. 트와이스가 Mnet 오디션 프로그램 ‘식스틴’을 통해 멤버 구성을 했듯 니지 프로젝트도 지난 4월부터 니혼테레비(NTV)를 통해 데뷔 과정을 중계했다. 이를 통해 탄생한 걸그룹 ‘니쥬(NijiU)’는 멤버 전원이 일본인이지만 한국 걸그룹과 큰 차이가 없다. 정식 데뷔에 앞서 지난 6월 30일 발매한 디지털 미니 앨범 ‘메이크 유 해피’는 지난달 오리콘 주간 디지털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박진영 JYP 대표 프로듀서가 심사를 진행하면서 출연자에게 한 조언이 반향을 일으킨 것도 니쥬 인기를 거들었다. 그는 “재능은 꿈을 이뤄주지 않습니다. 과정이 결과를 만들고, 태도가 성과를 만듭니다” “단점이 없는 것보다 특별한 장점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같은 말을 통해 ‘이상적인 상사’로 급부상했다. 이와 함께 방탄소년단이 지난달 15일 일본에서 발매한 정규 4집 앨범도 올해 앨범 누적 판매량 1위 기록을 계속 갈아치웠다.
플랫폼 변화와 콘텐츠 경쟁력의 결합
올 들어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잇따라 인기 몰이 중인 배경에는 먼저 콘텐츠 플랫폼 변화를 들 수 있다. 과거 특정 방송국이나 한류 채널을 통해 드라마가 소개됐던 것과 달리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OTT)인 넷플릭스를 통해 유통되면서 접근성이 높아졌다. 일본 저널리스트인 지부 렌게는 지난 5월 아사히신문 온라인판에 쓴 글에서 “텔레비전과 DVD가 주류였던 ‘겨울연가’ 붐 시대와 달리 ‘사랑의 불시착’은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 몇 번이라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추천 시스템도 플랫폼 변화에 따른 특징이다.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나면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 ‘슬기로운 의사생활’ ‘부부의 세계’ 등이 추천목록에 떠 일본 넷플릭스에서 서비스하는 다른 한국 드라마로 시선을 유도한다. 황선혜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비즈니스센터장은 “OTT가 한류 전문 채널이나 방송국과 다른 점은 추천 시스템”이라며 “추천 시스템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한국 드라마들이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일본 내에서 재택근무와 자숙(自肅·외출이나 영업 자제) 요청으로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 동영상 수요가 늘어난 것도 이유가 됐다.
특히 최근 한류 드라마 붐에 불을 댕긴 ‘사랑의 불시착’은 상대적으로 낯선 북한을 배경으로 하면서 드라마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 정진수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사장은 “평소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정치적인 것이 많은데 드라마에선 북한의 일상이 그려지면서 생활방식이나 사투리 등에도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대만 출신 소설가 온유주,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등을 통해 ‘사랑의 불시착’의 인기 요인과 작품의 의미에 대한 분석을 싣기도 했다.
드라마, K팝, 출판 등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는 공통 배경에 일본과는 다른 여성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6월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 인기에 대해 “SNS에 ‘재밌다’고 올리는 사람 중에는 20~40대가 눈에 띈다”며 “특히 일하는 여성들로부터 여자 주인공이 ‘우물쭈물하지 않고 시원시원하다’라고 호평한다”고 전했다.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한국식 아이돌 ‘니쥬’의 탄생 역시 아이돌에 대한 일본 내 선호가 달라진 것과 무관치 않다. 한국 걸그룹은 귀여움을 강조하는 일본 걸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퍼포먼스가 강하고, 다양한 콘셉트를 내세운다. 일본 출판시장에서 먼저 주목받은 ‘82년생 김지영’ 역시 일본에선 다뤄지지 않던 소재인 페미니즘으로 일본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의 저변도 확대되고 있다. 출판이 단적인 예다. 지난달 18일 포브스 재팬은 “‘82년생 김지영’ 히트 뒤로 한국문학의 판매 추세가 전반적으로 달라져 왔다”며 “처음에는 젊은 여성을 타깃으로 했지만 현재 독자층은 50대 여성으로도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중학교 도서관에 작품이 놓이면서 10대들의 감상도 출판사에 전달되고 있다”고 전했다. 황 센터장은 “일본 내 흐름을 보면 현재 한류는 일본에서 일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도쿄 도심에서 10, 20대 여성 중 스마트폰에 한국 노래가 없거나 가방 안에 한국 화장품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