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시장의 부재, 캄캄한 서울시

입력 2020-08-18 04:04

선출직 광역자치단체장은 장관급이다. 그중에도 서울시장은 조금 더 특별하다. 대한민국 수도의 기관장이라는 ‘타이틀’만이 아니다.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국무회의에도 부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중앙정부의 정책 수립에 지자체장으로선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셈이다.

박원순 전 시장이 여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뒤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벌써 한 달 하고도 1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는 ‘시장의 부재(不在)’를 뼈저리게 아파하고 있다. 그냥 박원순 ‘개인’에 관한 아쉬움이 아니다. 시장이 없어서 겪어야 할 ‘정책적 서러움’을 여러 차례 겪고 있어서다.

지난 4일 정부의 ‘8·4 부동산 대책’이 발표됐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보다 앞서 서울시는 엠바고(보도유예)를 걸고 “정부가 곧 아파트 가격 안정화를 위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서울의 아파트 공급을 크게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한데 우리는 지지부진한 재건축 시장을 획기적으로 바꿀 대안을 세워놨다. 민영 재건축 활성화를 위해 행정적, 제도적 장치를 신설하거나 보완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 사이 박 전 시장이 사망했고, 예정대로 발표된 정부의 대책엔 민영 재건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공공 재건축’이란 말이 들어갔다. 재건축 개발 이익을 90% 이상 환수하고 임대와 분양이 혼합된 노후 아파트를 다시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시는 발표 당일 백브리핑을 통해 “공공 재건축에 찬성하느냐는 사전 조사에서 서울시내 재건축조합 중 찬성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정부는 사전 협의에서 서울시 쪽 의견을 대부분 묵살했다.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아파트값을 잡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을 전했지만, 정부는 “공공 재건축만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해버렸다.

서울시는 규제로만 일관하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서울시민들에겐 안 먹힌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 ‘사겠다’는 수요를 ‘사지 못하게’ 막고, 공급은 쥐꼬리만큼 늘리면 시장은 더 들끓기 마련이다. 부동산이 아니라 식료품, 생필품이라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집어삼킬 때 미국과 유럽에서 휴지 사재기 열풍이 분 게 그 증거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휴지가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너 나 할 것 없이 사려고 몰려든다. 시장의 안정은 불안감 해소에 달려 있다. 잠재적 수요를 줄이는 방법도 ‘저건 언제든 또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공급된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잠재적 수요가 줄어야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서울시는 재건축 시장을 확 풀어서 ‘언제든 아파트를 살 수 있겠구나’라는 안정감을 구매 수요자들에게 던지려 했다. 방법은 노후 아파트 재건축을 민영에 맡겨 속도감 있게 공급 물량을 늘리는 것이다. 재건축 시행 주체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공공 재건축’으론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만약 박 전 시장이 성추문에 휩싸여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정부는 어떤 발표를 했을까. 이번처럼 ‘철저하게’ 무시하진 못했을 것이다. 박 전 시장이 “광화문 일대 전체를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무리한 주장을 했을 때도 정부는 저렇게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교통 대책부터 세워라”는 정도였다.

서울시장의 존재감은 굳이 박 전 시장이 아니었더라도 언제나 거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노무현정부 시절 서울시장 자격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해 진보 여권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다. 박 전 시장도 박근혜정부 당시 이에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 지금 서울시가 체감하는 단어는 캄캄함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년 4월 7일 재보궐 선거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