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지속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두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버티고 있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길 간절히 바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점차 지쳐간다. 이번엔 지속되는 장마에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바라보는 상황이다. 이토록 여름 내내 전국에 비가 내린 적이 있었던가. 첨단과학 기술로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룬 인류에게 자연이 숨은 위력을 과시하며 본때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고대 사회에서 자연은 늘 숭배의 대상이었다. 땅과 강과 숲, 그 안의 생태계는 인류에게 풍요로운 소산을 전해주는 삶의 터전이다. 동시에 자연은 인간을 떨게 만드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인류 문명은 이런 자연을 경외하며 숭배하는 종교 유산을 발전시켰다. ‘위대한 자연의 아들’이라고 자부하는 지배층이 나타나 인류를 속박하고 종속시킨 사례도 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경고한 모든 우상은 자연과 연관돼 있다.
성서는 자연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선포하며 시작된다. 자연의 소산은 신의 선물이며, 인간은 자연에 이름을 붙이고 관리하는 문화적 소명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도 일러준다. 자연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종속시킨 우상숭배 문화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기독교 문명을 근간으로 한 서구문명사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속박이 시작된다. 근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획은 ‘자연의 수학화’다. 자연을 수학적으로 치환해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만들면 지금껏 인간을 공포에 떨게 한 자연재해에 대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자연을 개발하는 방법도 알 수 있다. 자연이 학습을 넘어 정복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며 ‘생육하고 번성케 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으로 해석되면서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침없이 자연을 파헤쳤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여기저기서 자연의 신음을 듣는다. 어디 환경뿐이겠는가. 파괴된 환경의 부작용은 다시 인간을 향한다. 바이러스와 장마로 인한 재난은 대자연 앞에 여전히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그간의 탐욕과 교만을 일깨워주는 경종이다.
성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 창조의 궁극은 인간과 환경 모두가 조화 속 평화를 이루는 안식일 자체임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 가운데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삶의 전환을 강조한다.
자연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재난이 지나가면 달라질 수 있을까. 오늘도 골목에 쌓인 엄청난 일회용 쓰레기 더미를 보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길어지는 재난 상황이 하루속히 지나가길 고대한다. 모두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걸 기다릴 터다. 교회 역시 코로나19 상황이 끝나고 다시 대면 예배와 활발한 사역을 ‘회복’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사회 각계에선 이전 생활로 돌아가기 힘들 것으로 보고 새로운 삶의 표준인 ‘뉴노멀’을 말한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그저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다. 코로나 이후엔 우리가 다른 삶의 모습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뉴노멀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자연과의 공존을 실천하는 생활습관의 전환으로 시작돼야 한다. 이런 거듭난 삶의 의식과 태도를 교회가 먼저 시행해 교인에게 전파했으면 한다. 구원의 복음이 사람뿐 아니라 생태계에도 적용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살리는 복음의 핵심이니 말이다.
윤영훈(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