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젠더 불균형 전복시킨 ‘트페미’들의 천국

입력 2020-08-15 04:05
오늘부터 공희정·황진미 평론가가 필자로 참여하는 ‘드라마는 시대다’를 25회에 걸쳐 매주 선보입니다. 대중과 가까이서 호흡해온 드라마에는 사회상이 담겨 있습니다. 1970년대 작품부터 최신작까지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을 시대의 취향과 함께 역순으로 풀어갑니다. 첫 회는 지난해 여성을 앞세운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와 JTBC ‘멜로가 체질’입니다.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와 JTBC ‘멜로가 체질’은 2016년 이후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여성주의가 강렬하게 각인된 드라마이다. 특히 트위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익명의 페미니스트들이 쏟아놓은 비평의 담론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진 듯하다.

여자끼리 다 해먹는, ‘트페미’들 천국

2016년 이후 한국사회를 강타한 여성주의 흐름은 여성을 전면에 세운 드라마 제작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는 포털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3명을 통해 이성애 속 젠더 불균형을 전복시켰다. tvN 제공

‘검블유’는 포털업계를 배경으로 여자끼리 ‘다 해먹는’ 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세 명의 주인공이 포털 ‘유니콘’을 업계 1위로 만들고 해고당한 배타미(임수정), 그의 사수였으나 이제는 원수가 된 송가경(전혜진), 배타미가 경쟁사인 ‘바로’로 이직한 후 함께 일하게 되는 실력자 차현(이다희)이 모두 여자이다. 그뿐인가. 유니콘의 대표이사 나인경, 유니콘을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는 재벌 회장 장희은, 미국에 있는 유니콘 본사의 대표도 모두 여자다.

모든 강렬한 서사는 세 명의 주인공 사이에서 애증, 선망, 의리, 배신 등에서 나오고, 가장 강렬한 갈등은 막후 권력자 장희은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송가경에게서 나온다. 이 드라마에서 남성의 존재와 이성애의 감정은 매우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가운데 여성 캐릭터의 성별 묘사 편향성을 평가하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이 드물 정도로, 서사를 이끄는 것은 주로 남성이었으며, 여성들은 부속된 존재로 취급돼왔다. 이를 감안하면 ‘검블유’는 획기적인 젠더 역전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완전한 판타지는 아니다. 실제로 포털업체는 다른 조직에 비해 여성 임원 비중이 높고 합리적이고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편이다. 드라마는 이를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심지어 바로에서는 직책이나 직급이 아닌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한다. 개인 생활을 중시하고 전문성과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소신 있게 행동하며 책임을 지는 성숙한 조직문화가 돋보인다. 이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드라마로 선취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성애 관계 속 젠더의 역전도 호쾌하다. 박모건(장기용)은 배타미가 하룻밤 상대로 만난 열 살 연하남으로, 배타미의 인맥에 의해 일자리를 잃거나 얻는다. 한민규는 송가경이 호스트바에서 만난 남자로, 연예인이 된 후 호스트바 경력이 탄로 나자 자살을 시도한다. 신인배우 설지환은 팬심을 품은 차현에게 여러 가지 지원을 받는다. 회장인 장희은은 남자 누드모델을 세워놓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런 광경들은 기존의 성별 위계를 완전히 뒤집은 거울상이라 할만하다. 드라마는 매회 여성 관객들의 마음이 뻥뚫릴 만큼 호쾌한 장면들을 넣어주는데 가령 차현이 엘리베이터에서 성추행범을 때려잡고, 배타미가 성범죄자인 유력 정치인을 몰락시키고, 송가경이 호스트바에서 손님 외모 품평하는 남성 접대부를 ‘참교육’시키는 장면들을 꼽을 수 있다. 야구방망이를 든 배타미와 차현이 오밤중에 외제차를 박살 내는 장면은 ‘도깨비’ 같은 드라마에서 남자 둘이 했던 장면의 재현이다.

드라마는 말초적인 여성들의 억압을 풀어주는데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본원적인 소망을 담고 있다.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남성과 같은 권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배타미와 차현과 송가경은 윤리적 선택을 한다. 직원과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미온적인 선택을 하는 남성 대표에게 차현은 올바른 비판을 하고, 배타미는 위기의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남과 같은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며, 송가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책임지는 용기를 발휘한다. 이들은 잘못된 권력과 자본에 굴하지 않고, 대의와 정의와 자존심을 지켜낸다.

아울러 드라마는 인터넷 시대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떠오른 포털의 민주적 운영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침해받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포털에 대한 어떤 공적 감시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이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이슈라 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트잉여’의 수다

이병헌 감독의 JTBC ‘멜로가 체질’은 한 집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을 비추면서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조명했다. JTBC 제공

‘멜로가 체질’ 역시 최신 인터넷을 중심으로 공유된 여성주의적인 정서를 담는다. ‘트잉여’(트위터+잉여)적인 유머와 이병헌 감독 특유의 대사발이 한껏 묻어있는 로맨틱 코미디이다. 이병헌 감독은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 감독의 반열에 올랐지만, 본래 ‘마이너’한 작업들을 꾸준히 해온 감독이다. ‘과속 스캔들’과 ‘써니’를 각색했으며, 신인 감독의 입봉기인 자전적 형식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힘내세요, 병헌씨’를 찍기도 했다. 영화 ‘스물’의 흥행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찌질한 청춘들의 성장을 그린 이 영화가 인터넷이나 웹툰의 ‘병맛’ 유머에 익숙한 젊은 남성 관객들의 ‘루저’ 정서에 공명했다. 이후 ‘바람바람바람’의 실패를 딛고, 유머코드를 조금 대중적으로 다듬은 ‘극한직업’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말맛과 리듬감이 탁월한 코미디 감독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멜로가 체질’은 이병헌 감독이 천만 감독이 되기 전에 찍었던 웹 드라마 ‘긍정이 체질’의 설정과 분위기를 살려서 장편 드라마로 만든 작품으로,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를 표방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막힌 대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구체적인 욕망을 풀어놓는다. 특히 연애에 대한 묘사가 생생한데, 지리멸렬한 애증을 이어가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모순된 감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린다. 드라마는 신인 작가인 진주(천우희)가 쓰는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라는 작품이 극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담는다. “여자들만 나오고, 사건이 아닌 캐릭터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드라마”라는 진주의 설명은 그대로 ‘멜로가 체질’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멜로가 체질’ 역시 신인 여성 작가와 잘나가는 남성 감독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안과 밖에 잘 구분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대안 가족처럼 한집에 사는 세 친구를 중심으로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담는다. 모두 문화산업 분야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고, 직장 내 성희롱이나 싱글 맘의 고충 등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을 생생하게 담는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이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언어 구사력은 ‘트페미의 힙한 정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 서사를 살펴보면 여성 서사로 보기에 모호한 측면이 있다. 여자들의 삶에 이성애 관계가 너무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전여빈)의 성공에는 옛애인 홍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은정은 성공과 필생의 사랑을 안겨주고 죽은 홍대를 잊지 못해 자살시도를 했으며 홍대의 환영과 더불어 산다. 그는 다음 작품에 대한 영감도 새로 만난 남자를 통해 얻는다. 진주가 공모전에 응모한 원고는 공식적으로는 떨어졌지만 잘나가는 손감독 눈에 들어 제작 기회를 얻는다. 두 사람은 함께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만취된 상태로 같이 자는 사고를 친다. 순진한 대학생이던 한주는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무책임한 남자와 사귀었다가 싱글맘이 되어버린다. 남자에 질릴 만도 하지만, 다시 부하직원에게 연정을 품는다. 까다로운 여배우인 소민은 매니저인 민준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요컨대 드라마 속 여성들은 모두 일로 만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남자가 관계 우위에 놓인다. 이는 ‘검블유’와 비교해보면 분명히 다른 점이다. ‘검블유’의 세 여자들은 일과 연애를 분리했으며, 남자와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우위를 점했던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남자 못 잃는’ 낡은 젠더 구도를 답습한다. 또한 오랜 친구인 세 여자가 함께 살지만, 각자 연애에 빠져 있을 뿐 이들끼리의 상호작용이 적은 것도 아쉽다. 그러나 은정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소민을 다큐멘터리로 찍으며 차츰 이해한다든가, 한주의 멋진 여성 상사가 올바른 리더십을 보여주며 한주의 커리어를 끌어주는 모습은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검블유’와 ‘멜로가 체질’이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보다는 넷 상에서 구현된 현실이거나 근미래적 정서를 보여준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미래는 여기 있다.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가장 앞선 영역에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트페미’들이 꿈꾸는 천국이요, 먼저 온 미래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