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이 만든 작품, 민간 제작사가 새 버전으로 상업화

입력 2020-08-05 04:04 수정 2020-08-05 23:58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한 장면. 지난달 4일 개막한 이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을 거쳐 민간 제작사인 아이엠컬처의 손에서 재탄생했다. 한국에서 공공극장이 만든 창작물을 민간 제작사에서 건네받아 레파토리로 만든 첫 사례다. 아이엠컬처 제공

뮤지컬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역사는 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재학생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창작플랫폼 페스티벌에서 시작한다. 당시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의 프로듀서인 조형준 실장은 외톨이 소년이 학교를 떠도는 귀신을 만난 뒤 해체 직전의 동네 농구단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 끌렸다. 이 작품은 그해 말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의 소극장인 별무리극장에 오르게 됐다.

지난달 4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한예종,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을 거쳐 민간 제작사인 아이엠컬처의 손에서 재탄생한 버전이다. 한국에서 공공극장이 제작한 창작물을 민간 제작사에서 건네받아 레퍼토리로 만든 첫 사례다. 정인석 아이엠컬처 대표는 “2018년 대학로 공연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직접 주최했는데 상업화 노하우가 다소 부족했다”고 말했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의 확장이 의미 있는 것은 미국과 영국 등 해외와는 달리 지금까지 국내에선 공공의 작품을 민간이 대중화한 사례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공극장에서 만든 창작물이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작품이 적었다.하지만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은 10여 년간 창작 영역을 국한하지 않고 대중화할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유연해진 공공과 민간의 숙련된 노하우가 만나면 큰 시너지를 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작품 제작까지는 당장의 수익을 좇지 않는 공공의 환경이 효율적이지만 1~2년 정도면 예산 투입이 끝나 확장성이 떨어진다. 이후의 과정은 레퍼토리 화 등 상업화 노하우를 가진 민간 제작사에 더욱 용이하다. 민간 입장에서는 수익 없이 작품을 개발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비영리 제작사에서 개발한 작품을 민간 제작사에서 보완해 대중화한 뒤 수익금의 일부를 로열티로 제공하는 ‘인핸스먼트 계약(enhancement deals)’이 자주 이뤄진다. 세계적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바로 인핸스먼트 계약 방식으로 상업화에 성공한 대표 사례다. 원래 영국에서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RSC)가 처음 만들었지만 프로듀서 캐머런 매킨토시가 업그레이드를 통해 상업화에 나섰다. 초연 이후 매년 RSC에 ‘레미제라블’의 로열티가 지급됐다. 뮤지컬 ‘렌트’ ‘넥스트 투 노멀’ ‘스프링 어웨이크닝’ ‘해밀턴’ 같은 유명 뮤지컬도 인핸스먼트 계약으로 성공한 사례다.

한국에서는 해외 비영리 단체의 공연권을 구매해 상업화한 사례로 EMK뮤지컬컴퍼니의 ‘엑스칼리버’가 있다. 이 공연은 2014년 3월 스위스의 세인트 갈렌 극장에서 ‘아더-엑스칼리버’라는 제목으로 처음 선보였다. EMK는 인핸스먼트 계약 형태로 공연 판권을 확보해 다시 제작했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은 작품 개발과 상업화를 맡은 공공과 민간 제작사가 모두 한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해외와 마찬가지로 아이엠컬처에서 안산예술의전당에 로열티를 지불한다. 지난해에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재단과 아이엠컬처가 공동제작하면서 투입한 예산 비율로 수익을 배분했지만 올해는 아이엠컬처에서 모든 예산을 집행하면서 로열티 형태로 바뀌었다.

정 대표는 “앞으로는 공공극장의 초기 작품 개발 과정부터 민간 제작사가 참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며 “그 전에 이런 과정을 위해 시간에 쫓기지 않는 프로세스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