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세 대통령의 조롱, 사과, 침묵

입력 2020-07-30 04:04

2018년 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성폭력 범죄자들이 책임을 회피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침묵을 지킨다. 정부는 성폭력 인식을 높이고, 가해자들이 책임을 지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해 4월을 전국 성폭력 인식 및 예방의 달로 선포했다. ‘미투’ 운동 확산이 계기였지만, 소수자 및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언행을 일삼던 전력에 비하면 뜻밖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몇 달 뒤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예일대 출신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가 성폭력 의혹에 휩싸였다. 피해 여성이 용기를 내 공개했지만 논란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일부 공화당 의원과 보수 진영은 이 여성의 폭로 배경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계 역시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쪽으로 양분됐다. 중간선거 유세에 나선 트럼프는 이 상황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는 이 여성을 겨냥해 “왜 그땐 얘기하지 않고 이제 문제를 제기하나”고 했다. 나아가 피해자를 공개적으로 조롱까지 했다. 트럼프는 캐버노의 대법관 취임 당일 그와 그 가족에게 ‘미국을 대표해’ 사과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았던 2013년 5월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이 있었다. 대통령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여러 논란 와중에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건 발생 나흘 뒤였다. 그는 “무조건 잘못됐다. 국민과 피해자 본인, 가족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누구도 책임질 일이 있다면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사과문을 발표했다. “큰 실망을 끼쳐 송구스럽다. 동포 여학생과 부모님이 받았을 충격, 동포 마음에 큰 상처가 된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철저히 사실관계가 밝혀지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사과는 피해자와 가족, 국민에게 했다.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의 흐름을 보면 2년 전 미국 정가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이 사건을 놓고 여권이 보여준 모습은 과거와는 180도 달랐다. 피해자는 엄연히 있는데 피해자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당에서 나온 말은 피해호소인이었다. 더 나아가 피해자를 공격하는 막말과 인신공격 등 2차 가해가 쏟아졌다. 여권의 성인지 감수성은 네 편 내 편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 셈이 됐다. 이중적 태도에 호된 여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여당은 결국 뒤늦게 사과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침묵이 보름 넘게 이어지고 있다.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성평등 공약을 발표하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고 밝혔던 문 대통령은 여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 범죄엔 누구보다 단호한 대응과 엄정한 처벌을 주문해왔다.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엔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고, 얼마 전 n번방 사건 때는 피해자들에게 모든 지원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문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는 “박 전 시장과 오랜 인연인데 너무 충격적”이라는 전언 외에 별다른 말이 없다. 피해자에 대한 언급도 없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때도 그랬다. 청와대는 아직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공식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지만 어딘지 군색해 보인다.

문 대통령이 유독 길게 침묵을 이어가는 데 다른 고려요소가 있어선 안 된다. 문 대통령은 3년 전 취임사에서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통치행위다.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지어지겠지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내놓아야 할 메시지 차원이라면 이미 그 시기는 놓쳤다. 박근혜정부는 실패한 정부지만, 이런 점이라도 배우면 어떨지.

남혁상 정치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