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4월 8일 남북 합의서와 별도로 30억 달러 규모의 대북 지원을 명시한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진위에 대해 6·15 남북 정상회담에 깊숙이 관여한 인사들은 “그런 문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이 문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입장이 엇갈렸다. 일부 인사는 “이면합의를 할 사안 자체가 아니다”고 한 반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정보 수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수행한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2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경제협력 합의서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며 “그런 문서가 있었다는 걸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임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에서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남북 회담을 총괄·주도했다.
임 전 원장은 “(문건 자체가) 가짜이고, 그런 게 있을 수 없다”며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말이 맞는다. 나는 본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공개된 합의서 내용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비밀합의를 할 내용이 아니다”며 “비밀합의 같은 게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원장은 또 “당시 현대가 대북사업을 위해 합의한 내용이 있을 것인데 (합의서 내용과) 혼동하고 있다”며 “5억 달러 제공은 현대와 북한이 합의한 것이고 정부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합의서에 명시된 5억 달러와 현대가 북한에 7대 사업권의 대가로 지급한 금액은 별개라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6·15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했던 한 인사도 “30억 달러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그런 거액을 특사였던 박 후보자가 약속하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북 대표들이 공식적으로 논의할 성격의 내용인데 특사가 어떻게 약속을 해줬겠느냐”고 반문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이 인사는 합의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대통령기록물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기록물을 보고 관련 지시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직 대통령 본인이나 열람 대리인이 아닌 경우 지정기록물을 열람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거나 관할 고등법원장이 중요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발부한 영장이 있어야 한다.
6·15 남북 정상회담에 실무자로 참여했던 전직 정부 고위 당국자는 사실일 가능성을 열어놨다. 그는 “합의서를 보지는 못했다”면서도 “박 후보자 본인의 서명이 있는 만큼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문서가 진짜라면 원본은 국정원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원본뿐 아니라 복사본도 있을 텐데 박 후보자 본인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북회담에 관여한 기관들은 일반적으로 합의서 원본 외에 복사본도 만들어 보관해 왔다고 이 인사는 설명했다.
미래통합당은 중국 베이징에서 박 후보자가 북측과 정상회담 개최를 약속한 ‘남북 합의서’와 별도로 30억 달러 대북 지원을 명시한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별도로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통합당이 공개한 합의서에는 ‘남측은 북측에 25억 달러 규모의 투자 및 경제협력 차관을 제공한다’ ‘남측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5억 달러분을 제공한다’고 적혀 있다. 문서 하단엔 박 후보자 서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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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손재호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