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난 피해자 편에 서기로 했다

입력 2020-07-28 04:04

편이 갈리는 게 항상 나쁜 건 아니다. 전선에 따라 나뉘는 편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내 안의 여러 정체성, 이를테면 성·세대·계층 같은 것의 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인에 대한 깨달음도 얻는다. 우리 사회 주류는 누구인지, 그들의 동맹과 적은 어디 있는지, 나는 누구와 한편인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충격적 죽음과 성추행 의혹, 이후 광풍 같은 논란은 우리 사회 내부의 균열을 벼락치듯 선명하게 보여줬다. 더불어 내가 서 있는 곳도 알게 됐다. 586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신주류, 노동운동을 하고 시민운동을 하고 여성운동을 하며 정치 엘리트로 성장한 그들의 건너편 어디쯤이다.

박원순 사태에서 나는 피해자 편에 서기로 했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만 남은 이런 상황. 따져묻고 사과하라고 소리칠 대상이 없어진 이상한 범죄의 현장에 홀로 남은 피해자. 트라우마에 죄책감까지 떠안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피해자를 난 응원하기로 결심했다. 사실관계를 확정하거나, 양자 고통의 무게를 재고 편을 택한 건 아니다. 그런 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피해자 쪽 풍경이 낯익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나에게는 시장보다 여비서의 고충을 이해하는 게 훨씬 쉽다. 여비서의 시선에서 관계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고, 여직원이 하는 고민에 더 쉽게 공감한다. 상급자로서 내가 미래에 저지를지 모를 실수보다 나의 자녀 세대가 조직 안에서 겪게 될 고통이 더 걱정스럽다. 게다가 지금 피해자가 처한 상황은 성폭력 피해자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 중 하나다. 누구도 성추행을 호소하며 이런 규모의 사회적 압력을 감당하겠노라 결심하지 않는다. 그런 리스크는 그만큼의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공인이 자신의 행동에 져야 하는 책임이다. 그 반대가 아닌 거다.

박 전 시장 장례식은 사태 전반에 걸쳐 가장 유감스러운 장면이다. 그의 죽음은 황망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장이라는 공적 추모의 방식에는 끝내 동의할 수가 없다. 유력 정치인 조문이 줄을 잇고, 생전 업적이 동영상으로 생중계되고, 지지자들이 오열하는 떠들썩한 장례가 범죄 혐의를 받는 정치인의 비극을 기리는 사회적 의례가 될 수는 없다. 선출직 정치인 박원순에 대한 공적 기억은 합의된 적이 없다. 게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버린 지금, 하나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해져버렸다. 잔인한 일이지만 그 역시 박 전 시장이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됐다. 피해자 측이 굳이 장례식날 기자회견을 한 것을 두고 여권 지지자들은 불쾌해한다. 하지만 한쪽의 이야기가 전국에 생중계됐으니, 피해자 역시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몇 년간의 고통스러운 미투를 거쳐 도달한 곳이 고작 여기인가. 실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온통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박원순 사태를 거치며 그대로인듯 달라진 현실을 목격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나아지지만 여전히 나쁠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 색출 작업과 음모론이 횡행하지만, 공적 영역에서 여권 주장의 최대치는 “진실규명과 추모는 별개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논란이 많았던 피해호소인 용어는 피해자로 정리됐고, 여성가족부는 늦게나마 현장 점검을 약속하며 움직이고 있다. 일부 여성단체 내부에서 벌어진 일에는 미심쩍은 대목이 있지만, 그들의 존재 덕에 피해자가 입을 연 것도 사실이다. 지난 4년 서울시 대처와 고소 유출 사건에 대한 수사도 시작된다. 저절로 이뤄진 일들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이 모든 걸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며 한 발씩 나간 미투의 성과라고 믿는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