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속 불평등·역차별을 반대한다

입력 2020-07-28 00:05

4·15총선으로 진보 진영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자 정의당은 1호 법안으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름만 바꾼 평등법의 입법을 권고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이룬다’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 다수가 찬성한다는 단순 질문의 편향적인 여론조사를 내세우며 반대하는 국민과 종교계를 몰아붙이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을 품고 섬기는 일은 진보와 보수 혹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계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를 실천해왔다. 성경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교회는 개화기부터 보육원 병원 학교를 열어 나라가 하지 못하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봤다. 특히 여성과 장애인을 우대했다. 기독교계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이번에 국회에 제출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평등법)’에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할 뿐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인종, 피부색, 용모, 임신, 가족 형태, 종교, 전과, 고용 형태, 성적 지향(동성애 등)에 따른 차별 등 무려 23가지 이상의 모든 차별을 금지한다. 이를 위반하면 국가인권위가 바로 시정조치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행할 때까지 계속해서 최대 3000만원씩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손해액의 2~5배에 달하는 징벌배상금을 부과하고 1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까지 부과한다. 그 어느 법보다 강력하다.

우리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보완하며 균형을 이룰 때 국민의 인권과 행복이 보장된다. 이를 위해 헌법은 자유를 법으로 제한할 때에는 예측 가능성과 비례(과잉금지)의 원칙을 제시하며 적절성과 법익균형성과 피해의 최소성을 요구한다. 특히 형사 처벌이나 이에 버금가는 징벌적 배상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에 구체적인 구성요건을 정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법치주의 내지 죄형법정주의의 요청이다. 헌법상 평등권을 구체화하려는 차별금지법도 이러한 헌법의 제한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민이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총 23가지 차별 사유를 열거하고 있다. 어디까지 차별인지, 무엇이 차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차별의 판단기준도 지극히 모호하고 주관적이다. 단지 차이를 ‘구별’만 해도 차별이 될 수 있으며 ‘괴롭힘’도 차별로 규정한다. 괴롭힘은 피해자가 수치심 모욕감 두려움을 겪었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주관적 심리적 기준으로, 객관적 사실과 관계없이 때로 억울하게 가해자로의 누명을 쓸 위험성이 상존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타인으로부터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는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인권위에 진정하면 상대방은 조사를 받는 것에서부터 각종 제재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당연히 국민이 이제까지 누려온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학문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심각하게 침해될 것이다. 국민이 누리는 자유를 이렇게까지 위협하면서 아직도 다수 국민이 수긍하지 못하는 성소수자, 종교소수자의 평등을 우위에 두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굳이 제정해야 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법은 현재도 많다. 여성차별금지는 여성가족부, 장애인 차별금지는 고용노동부, 외국인 차별금지는 법무부와 같이 법집행기관이 다르다. 차별의 본질이나 형태, 피해 등이 다르므로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주무부서가 차별시정의 주체가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자유권은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와 같은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사법부의 판결과 결정에 따라 보호해 왔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기존의 법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모든 차별을 판단하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인권위로 몰아주려는 것이 아닌가.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라는 웃는 얼굴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특정 그룹의 소수자에 대한 건전한 비판의 소리를 막아버리려는 것이 아닌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은 헌법과 법체계를 무너뜨리고 역차별의 초갈등 사회를 만들려는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크다. 국회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헌제 명예교수(중앙대·교회법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