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꽃’ 반지의 기억

입력 2020-07-24 04:02

접혀 있던 자국이 아직도 선명한 새 가운 차림으로 넓은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실습학생들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피식 나오는 웃음과 함께 어설프던 나의 첫 실습생활이 떠올랐다. 코앞에 두꺼운 전공 책 대신, 실습생 신분으로나마 실제 환자를 마주한다는 건 무척 긴장되는 일이다. 더욱이 담당 환자분이 나름 괴팍하기로 유명한 할머님이라는 간호사의 걱정 섞인 말투가 날 더 걱정스럽게 했다. 역시나 그분은 회진시간 담당 교수의 질문에조차 무뚝뚝한 단답형 대꾸뿐. 나 같은 피라미 실습생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문진은커녕 인사조차 못 건네는데 어찌 학생주치의를 해나갈지 끙끙거리던 때였다. 쩔쩔 매는 내가 불쌍했던지 가족 분이 할머니가 원래 동네에서 유명한 멋쟁이인데 환자복으로 병실에 갇혀 지내다보니 심기가 불편해서 그렇다는 위로를 건넸다. 그 말에 문득 꽃반지라도 떠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실습 중 짬짬이 대기할 때의 졸음을 이기려고 코바늘을 배우던 참이었는데, 작은 꽃반지 정도라면 초보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뒤에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운 할머님 침상 옆 탁자에 꽃반지 몇 개를 올려두었다. 이게 뭐냐며 던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습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그분 회진을 마치고 병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할머님의 장난 어린 시선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는데, 조용히 이불을 들어 알록달록 반지 낀 손을 내게만 보여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나오는 환호성을 가까스로 꿀떡 삼키고는 선배 의사들의 회진 행렬을 따라갔지만, 붕붕 뜬 마음은 내려오질 않았다. 며칠 뒤 할머님은 무사히 퇴원하셨고, 시간은 흘러 나는 어느새 회진을 주관하는 선생의 위치에서 병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린 학생의 어설픈 뜨개 반지에 장단을 맞춰주셨던 할머님의 마음이 이맘때면 마치 어제 일같이 떠오른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