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정부가 한국판 ‘부유세’의 시동을 걸고 있다. 상위 0.05~2.5% 고소득층에게 향후 5년간 약 2조원의 세금을 더 걷어 이 돈을 서민·중산층을 위해 쓴다는 복안이다.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부동산, 고소득 등 부(富)에 대한 세금 인상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꾀하라는 권고와 비슷하다.
정부는 22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2020년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회적 연대와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고자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초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을 인상한다”며 “코로나19로 어려운 서민·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기재부에 따르면 향후 5년간 고소득층·대기업 세금은 1조8760억원 증가한다. 반면 서민·중산층과 중소기업 세금은 1조7688억원 줄어든다. 이를 위해 정부는 26년 만에 소득세 최고세율을 45%로 되돌렸다. 대략 연봉이 10억원 초과한 사람들의 경우 소득세 세율이 42%에서 3% 포인트 올라간다. 상위 0.05%, 1만6000명이 세금을 9000억원 더 내게 된다. 현 정부가 소득세 최고세율을 올린 건 출범 직후인 2017년 이후 두 번째다.
지난 10일 발표한 부동산 대책으로 다주택을 소유한 자산가들의 세금도 늘어난다. 3주택 이상 및 조정대상지역 2주택 소유자는 내년부터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이 3.2%에서 6.0%로 두 배가량 뛴다. 전체 인구의 0.4%가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주식 양도소득세 또한 주식시장 소득 상위 2.5%에 부과한다. 2023년부터 수익이 5000만원 이상인 15만명이 양도세를 내야 한다. 1조5000억원의 세금이 더 걷힐 것으로 보인다.
고소득자가 더 낸 세금은 서민·중산층, 중소기업에 돌아간다. 부가가치세 간이과세자와 납부면제자 기준을 조정해 57만명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부담을 덜기로 했다. 기업들의 투자에 대한 세금 혜택도 5500억원 규모로 늘린다. 2023년까지 증권거래세도 인하해 2조4000억원 세 부담을 낮춘다.
전문가들은 위기에 세금을 통한 재분배는 필요하다면서도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이 전격적으로 발표된 것은 충분한 논의 없이 이뤄진 것이어서 문제라고 언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주식 양도소득세 과세에 대한 지적이 있은 뒤 정부가 세제를 다시 손보면서 사실상 부족한 세수를 소득세 인상으로 채운 것으로 보고 있다. 주식시장 개인투자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고소득층이 세금을 더 내도록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사회적 연대를 고려하면 부유세, 부자증세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고통 분담에 대한 설득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은 주식 양도세 조정에 따른 세수를 메우기 위해 사회적 공론화 없이 갑자기 도입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부유세의 경우 고소득층의 소비·투자 위축으로 국내총생산(GDP)이 감소할 수 있으며, 조세 회피 시도가 강해질 수 있다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국은 2012년 고소득자 소득세를 올리는 ‘버핏세’ 최종 도입에 실패했고, 프랑스도 비슷한 시기 ‘부유세’를 도입했다가 2년 만에 중지한 바 있다.
세종=전슬기, 이종선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