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세계적 감염병 코로나의 한복판에서 터진 사건 하나로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 보인다. 성추행 혐의를 받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알려진 그가 약자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고 우리 모두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비극적 죽음은 지지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왜 그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 곁을 떠난 것인가. 진보적 지도자의 ‘정치적 자살’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코로나와 어느 정치인의 자살 사이에는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는 연관성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코로나 감염병이 야기할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훨씬 더 위험한 것처럼, 자살이라는 행위의 비도덕성보다 어떤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도덕에 훨씬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진 포스트 코로나 사회의 정상화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어느 정치인의 죽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그 슬픔을 딛고 정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려면 이 사건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위선적 윤리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는 것을 ‘위선(僞善)’이라 한다. 도덕은 불의와 부정부패로만 붕괴되지 않는다. 도덕은 위선으로 서서히 부식되고, 결국에는 자기모순으로 붕괴된다. 도덕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하기 때문에 물론 타인에게 선하게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겉으로만 착한 체하면서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때 도덕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실제로도 선하고 겉으로도 선하게 보이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약한 인간이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 전 시장의 죽음에 대한 진보진영의 태도는 도덕의 마지막 토대인 상식과 원칙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떤 비판적 반성도 없이 평상시 그의 도덕적 성품과 정치적 업적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정치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유서에서도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어떤 사과의 말도 남기지 않은 것처럼, 그의 죽음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우리의 도덕의식을 허무는 일차적 공격이다.
여기에다 진보진영은 이 정치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의 원인은 묻어버리고 죽음만을 부각시키려 한다. 어떤 이는 죽은 시장과 팔짱을 낀 사진을 올리고 자신이 성추행했다고 자수한다면서 피해자의 고소를 조롱하고, 어떤 이는 ‘피해 호소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피해자를 폄훼하고, 어떤 이는 조문의 예를 강조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당의 입장을 묻는 기자에게 욕을 한다. 모두 법규범을 담당하는 검사이고, 규범을 만드는 국회의원이고, 집권여당의 대표이다.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도덕성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세력의 이익과 이미지이지, 결코 우리가 최소한 지켜야 할 상식과 원칙이 아니다. 우리의 도덕의식을 붕괴시키는 이차 공격이다.
도덕을 정치화하면 이렇게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이념과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조그만 부도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상황이 거듭될수록 우리는 도덕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진영이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적폐로 찍어 내리고 배척할 때는 도덕을 내세우지만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는 이념과 대의로 덮어버린다면, 도덕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칸트는 이렇게 도덕을 정치화하는 사람들을 ‘정치적 도덕주의자’라고 불렀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도덕을 마음대로 재단하는 내로남불의 위선자들은 도덕을 황폐화한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도덕적 정치인’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과연 상식과 도덕적 원칙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검토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덕적 정치인이 언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가.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